은행나무 사랑법
은행나무 사랑법
  • 승인 2019.11.1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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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를 따라 한적한 산을 오른다. 갈바람에 억새가 희끗희끗 곱게 물들어 간다. 새롭게 펼쳐진 낯선 길 위에서 주름진 모습의 ‘할매바위’와 ‘용추폭포’를 만난다. 삼중창으로 흘러내리는 삼단폭포의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한 발 한 발 나무계단을 오르니 천태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국사 일주문에 다다른다. 영국사가 양산팔경중 제1경으로 꼽히는 데는 문화유적과 어울리는 아름드리 거목의 자태가 한몫했을 것이다. 노란 은행나무 사이로 파란 하늘이 잠긴다.

전국 문화예술인으로 구성된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천은사’ 대표 양문규 시인)’이 충북 영동군 양산면 천태산 영국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223호) 아래서 ‘2019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詩祭)’를 열었다. ‘천태산 은행나무의 시적 전망’이라는 주제로 고축문 낭독과 시 모음집 ‘천태산 별나무’ 출판기념회를 했다. 고귀한 생명을 내 일처럼 기뻐하고 감사하게 여기며 나아가 자신과 이웃, 대자연의 뭇 생명을 지켜내고 가꾸는 것을 소명으로 삼은 전국 401명의 시인이 자연, 생명, 평화를 노래하고 있다. 2009년 창립한 이후 현재 50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돼 있으며, 생의 반을 돌아서야 어렵게 시인의 꿈을 이룬 나는 올해 처음으로 참가를 하게 된 것이다.

반칠환 시인의 ‘은행나무 부부’ 전문을 걸으며 은행나무 아래 들어선다.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 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보지 못 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린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 놓은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 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얼까. 혹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이 아닐까. 은행나무가 없었다면 우리의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서로 마주보는 곳에 암수 나무가 서 있어야 함에도, 가까운 반경 안에만 있어도 은행나무 부부는 열매를 맺음으로써 세상의 시련을 함께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꼭 곁에 있지 않아도, 그저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만 있어도, 서로 잘 있다는 소문만 들을 수 있어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은행나무의 사랑법이 사람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하필 은행나무였을까. 중생대 쥐라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생존하여 온 가장 오래된 식물의 하나로 ‘화석나무’라는 별명을 가졌다. 공손수(公孫樹)라고도 불리는데 은행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 수십 년이 걸리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할아버지가 은행을 심으면 손자가 그 열매를 먹게 된다는 뜻이라 한다. 오랜 시간 그들이 제공해 온 혜택을 누리면서도 길어봐야 두 달가량을 우린 품어주지 않았다. 가로수로서의 자격을 거의 갖추었지만 악취가 난다는 단 하나의 단점으로 인해 해마다 반복되는 수난을 피할 수 없다. 말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인 은행나무에서 늙어가는 인간의 삶, 그리고 일그러진 자화상의 한 단면을 보는 듯 마음이 쓰려온다.

도심 곳곳에서 ‘은행털이’가 한창이다. 때가 이르면 저절로 익어 떨어질 것을 고가 사다리차에 올라탄 인부들이 가지를 작대기로 후려치거나 진동 장비를 장착한 굴착기를 동원해 강제로 나무 기둥을 흔들어 댄다. 떨어지라며. 하물며 은행이 맺히는 암나무를 수나무로 교체하거나 은행을 만들지 못하도록 봄철부터 약재를 살포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나무 아래 춤을 추는 사람들, 은행이 바닥에 떨어져 발길에 차이고 짓이겨지면 자신의 신발에 구린 냄새가 묻을까 봐 이리저리 뛰는 모양이 트위스트 추는 듯 닮았다.

아무리 옷깃을 여며도 영혼의 맨살이 선득해지는 계절, 세상은 언제나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갇혀 있다. 몇천 년을 그 자리에서 견뎌왔을 천태산 은행나무를 가만히 끌어안아 본다. 우리가 지상에서 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만큼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무는 오롯이 전해주는 듯 노란 은행잎을 축복처럼 내 머리 위로 쏟아 부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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