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여행처럼
삶도 여행처럼
  • 승인 2019.11.1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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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조 수필가
걷기를 좋아한다. 특히 제주올레 길을 좋아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훌쩍 하늘을 날아 제주 섬을 걷고 나면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 듯 홀가분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 그리고 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비로움과 여유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돌이 많은 제주에는 좁은 골목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 곳을 자주 만날 수 있다. 무심한 회색 담벼락에 올망졸망 화분을 매달아놓고, 그 아래 색 바랜 작은 나무의자 하나 슬며시 앉혀놓은 곳이 있다. 쉽게 버려질 조개껍질 하나에도 색깔색깔 옷을 입혀 뭉툭 잘려나간 나무둥치 위에 가만히 얹어놓으니, 그들의 조화가 절묘하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바닥에도 화사하게 그림을 그려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곳이 있다.

그런 길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행운의 네잎클로버를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의 작은 관심과 배려가 지나는 길손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쉬어갈 수 있는 위안을 안겨준다는 것.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자전거 페달을 밟고 지났더라면 그저 스쳐갈 수밖에 없었던 길을, 배낭을 메고 땀을 흘리며 걸었기에 만나게 되는 값진 보상일 것이다. 산과 바다와 돌과 바람 등 아름답고 싱그러운 자연이 있고, 골목골목 푸근한 인정이 있으며, 넘치는 재치와 여유…. 그러니 어찌 제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일전에도 친구와 ‘제주올레 걷기 축제’에 참가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손을 꼭 잡고 서로 의지하며 길을 걷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보기 좋았고, 아빠에게 안아 달라 떼를 쓰는 어린아이가 귀여웠다. 중국에서 이민 와 제주도에서 핫도그 가게를 한다는 젊은 여성, 무릎 보호대를 끼고 혼자 걷는 스페인 남성, 자전거 투어를 하며 광명에서 왔다는 초등 5학년 남자아이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엄마. 갈림길에서 모르는 길을 묻거나 안내해줄 수도 있다. 일면식이 없는 사람과도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같은 길을 걷는다는 공통점으로 끈끈한 길동무가 되기도 한다. 식권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남은 식권을 얻어 끼니를 때우기도 했으니, 그 또한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쉬엄쉬엄 걷다보면 마음의 쉼표와 여유도 생긴다. 여행을 할 때는 큰 기대를 가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냥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몽실몽실 주먹만 한 하얀 꽃이 핀 감자밭을 지나고, 무와 마늘 밭을 지날 때 자동분무기에서 물줄기가 날아와 옷을 흠뻑 적셔도 우리는 시원하다며 깔깔 웃었다. 하지만 그 길이 걷기를 위한 길이 아니었다면, 옷을 버리게 된 것에 얼마나 화가 났을까.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 황홀한 무지개를 만나거나 기쁨에 넘쳐 날아오를 것 같다가도 헤어날 수 없는 슬픔과 고뇌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은 오해로 빚어진 큰 불상사가 생길 수 있고,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혀 실망을 할 수도 있다.

여유가 없는 삶은 삭막하고 건조하다. 허겁지겁 앞만 보고 달려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다칠 수도 있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헐뜯고 손가락질하며, 기어코 경쟁에서 이기는 일은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행복한 일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삶도 여행처럼 느긋하게 기다리고 양보할 수 있다면, 아픔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여행을 ‘길 위의 학교’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여행을 할 때는 이해와 득실을 따지지 않고, 양보할 수 있는 너그러움이 있어서 좋다. 조금 늦어도 기다려줄 수 있고, 넘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달려가 일으켜 세워줄 수도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가고 싶은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잘 살기 위해서는 ‘적게 먹고, 많이 걸으며, 더 많이 웃어라’고 한다.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분수에 넘치는 기대를 갖지 않고 여행을 하듯 적당히 쉬어갈 수 있다면, 삶의 틈바구니에도 한층 부드러운 여유가 생길 것이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을 가까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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