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학파 거두’ 갈암 선생 정자 수백년 잠 깨다
‘영남학파 거두’ 갈암 선생 정자 수백년 잠 깨다
  • 이재춘
  • 승인 2019.11.14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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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수비면 신원리서
‘계정’ 석각 발견 화제
유거지 복원사업 탄력
갈암이현일선생-계정발견
지난 12일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 하천변에서 조선 중기 영남학파의 거두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건립한 정자인 ‘계정(谿亭)’의 석각(石刻)이 발견됐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이영재 학예연구사가 지난 12일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 하천변에서 조선 중기 영남학파의 거두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건립한 정자인 ‘계정(谿亭)’의 석각(石刻)을 발견해 화제다.

조선 중기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어온 이현일(1627-1704)은 영산서원의 원장을 역임한 석계(石溪) 이시명(1590-1674)과 최초의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여중군자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의 둘째 아들이다.

갈암은 20대 중반인 1653년 부모가 산속 은거를 택하자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로 이주해 ‘갈암’이란 집을 짓고 19년 동안 거주했다.

갈암이 지은 ‘계정기(谿亭記)’에 따르면 어느날 아버지를 모시고 동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신원천을 걷다가 기이한 바위와 맑은 물소리가 어우러진 명승지를 발견해 ‘계정(谿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바위에 두 글자를 석각했다고 한다.

갈암 등 일가는 ‘계정’에서 밤낮으로 학문을 닦으며 여가를 즐기는 등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삶을 구현했다.

‘계정’에서 학문을 닦은 석계의 아들들은 당대 학문으로 일가를 이뤘으며 1672년 석계 일가가 수비를 떠난 뒤에도 유거지와 정자는 당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방문하고 싶은 지역의 명소가 됐다.

그러나 1694년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에 인해서 시작된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해서 남인계가 몰락하자 갈암 또한 탄핵, 유배를 가기에 이르렀고, 1909년에 가서야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했다.

수백 년간 잊혀졌던 갈암의 ‘계정’이 2019년 5월부터 영양군 문화시설사업소에서 추진하고 있는 ‘수산유거지 복원사업’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이영재 학예연구사가 지난 11월 12일 ‘수산유거지’에서 동쪽으로 약 950m 떨어진 바위에서 ‘계정’이라는 석각을 발견함으로써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됐다.

오도창 영양군수는 “갈암 선생의 정자를 다시 찾게 된 것은 지역사의 발굴과 유거지 복원사업에 있어서 모두 대단한 중요한 성과”라고 말했다.

영양=이재춘기자 nan9056@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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