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찾지 말고 절대미감으로 봐주세요”
“의미 찾지 말고 절대미감으로 봐주세요”
  • 황인옥
  • 승인 2019.12.02 2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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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까지 을갤러리 ‘최상흠’展
벽면 수놓은 1천여개 큐브 조각
문패 매개로 물감 붓고 또 부어
사물의 본성이나 상징성 지워
개념 배제 직관적 예술미 선사
최상흠_설치뷰 5
최상흠 전시작





세상의 진리는 모두 허위라고 단언하고, 그것을 뒤집는다 하더라도 불변하는 진리 하나는 남는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작가 최상흠이 세상을 인식하는 틀도 “우주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변화한다”는 오직 하나에 맞춰져 있다. 그는 인간이 절대시하는 진리에 대한 믿음을 깨부순다. “사과라는 과일에 대한 인식은 사람마다 제각각일 수 있어요. ‘빨갛다’거나 ‘맛있다’거나 ‘둥글다’거나 등으로 다양하죠. 어떤 개념에 대해 하나의 특질로 영속화 한다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죠.”

언어는 인류의 인식과 사고의 결정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더 강렬하게 작동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언어가 오히려 사람들의 인식체계와 사고체계의 구조를 결정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사과의 예시처럼 언어가 개념화한 허구는 이미 속살을 드러냈다. 최상흠은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을 너머 ‘불립문자(不立文字)’로까지 바라본다. 개념화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결과로서의 언어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현상을 수용하는 편에 선다.

“그 어떤 언어도 완벽하게 개념화할 수 없다고 봐요. 모든 것은 계속 변하니까요. 저는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해요.”

말하자면 개념에 대한 배제다. 정치성과 사회성을 배제하고 오직 절대 미감(美感)에만 집중하고자 하는 것. 이러한 태도는 대학 재학 시기에 이미 형성됐다. 당시 그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고, 이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독서에 집중하면서 개념이라는 물기를 빼고자했고, 미술 자체에 집중하려는 태도를 가지게 됐다. “저는 작업에서 어떤 상징성이나 이미지의 표현과 거리를 둡니다. 작업 그 자체가 미술이 되죠.”

최상흠 개인전이 을 갤러리(EUL Gallery)에서 최근 개막했다. 거대한 조각판같은 작품이 전시장 벽면을 채우고 있다. 10여 미터에 달하는 전시장 벽면에 정확히 1,105개의 큐브 조각들이 걸렸다. 조각 하나의 크기가 가로 90㎜, 세로 201㎜, 깊이 25㎜다. 작가가 “문패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유년시절 집집마다 걸려있는 문패를 읽던 습관이 있었어요. 특히 수업이 파하고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는 동안 어둠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바라보던 기억이 떠올라 작업의 모티브로 삼았어요.”

작업과정은 복잡하다. 문패와 흡사한 크기의 틀을 만든 다음 바닥에 눕힌다. 그리고 표면에 자신이 직접 만든 산업용 페인트인 ‘인더스터리-물감(Industrt-Paing)’을 붓고 마르면 또 다시 부어 말리는 과정을 중첩한다. 대개 6~8번의 중첩과정을 거친다. 이때 동일한 색을 반복하기보다 각기 다른 색들을 중첩한다. 하지만 표면에 드러나는 결과는 한 두 계열의 색으로 통일감을 확보한다.

1,105개의 조각들에서 미세한 차이가 발견되지만 대개 붉은색과 녹색 그리고 푸른 계열로 압축돼 있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중요해 마지않는 작업 과정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과정을 탐닉할 수 있기는 할까? 그가 “조각 앞면이 아닌 옆면을 봐 달라”고 주문했다. 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에 눈길이 머물자 탄성이 쏟아졌다. 색을 중첩하는 과정에 흘러 내린 물감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작업 과정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부분이 물감을 통해 바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개념적이라기보다 직관적이죠.”

문패를 매개로 한 조각에 물감을 붓고 또 붓자 문패의 본성이 사라졌다. 물감을 부을수록 문패가 가졌던 상징은 멀어졌다. 애초에 매개로 했던 문패의 개념도, 문패에 새겼을 이름도 모두 본래의 모습을 잃어갔다. 대신에 절대 미감이 존재감을 발했다. 문패에서 절대미감으로의 변화였다.

이번 전시에는 큐브 조각을 벽면에 나열했지만 이전 전시들에서 바닥에 쌓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든 메시지는 일관된다. “의미보다 존재자체에 집중하는 태도”다.

“언어는 의미차원일 뿐 존재차원은 아니에요. 존재차원을 의미차원으로 이야기하면 존재 자체가 왜곡되죠. 저는 우주의 본질에 관심이 있고, 존재자체를 직접적으로 대면했을 때 오는 직관 체계가 진짜라고 봐요.”

그가 “존재는 존재 그 자체”라는 논리를 펼쳤다. 존재를 개념화해 의미차원으로 고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느끼는 것이라는 것. 그가 이번에는 “나는 특별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며 여운을 남겼다. “저는 인간이라는 유한자가 자연과 우주를 대하면서 올라오는 상식적인 의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인문학자는 인문학으로 자연과학자는 자연과학으로 우주를 연구하듯 작가인 그는 미술이라는 형식을 빌려 인류보편의 이야기를 한다는 취지였다. “저는 ‘옳다’, ‘그르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저의 경험치를 미술의 형식으로 보여주려는 것이죠.” 전시는 21일까지. 053-474-4888


황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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