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를 돌면
모퉁이를 돌면
  • 승인 2019.12.23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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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복기(復碁)라는 말이 있다. 한 번 두고 난 바둑의 판국을 비평하기 위하여 다시 처음부터 놓았던 그 순서대로 놓아 보는 일이다.

“바둑 끝나면 이기든 지든 복기를 하잖아요.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아요? 화나는 데 졌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한다는 게….”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어 은퇴를 결심했다’는 이세돌 구단에 던져진 오래 전, 어느 기자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 생각난다.

“오히려 어떻게 졌는지 모르는 게 더 답답하죠. 어떻게 이겼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떻게 졌는지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오답 노트 정리와 비슷한 개념이냐는 기자의 또 다른 질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좀 다른 느낌이죠. 바둑이 스포츠가 됐지만, 도자기를 구울 때 뭐가 잘못됐는지 알아야 다음에 좋은 것을 만들 듯, 바둑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바둑기사는 더 훌륭한 예술작품을 위해 복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룬 1승은 그에겐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예술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는 바둑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즐겁게 두는 것이며 예술로 배웠기 때문에 승패가 바둑이 가진 가치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대국을 마친 뒤 ‘복기’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로 ‘복기를 하지 못하면 발전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쩌면 오늘날의 그를 만든 것은 ‘돌아보는 힘’, ‘복기하는 과정의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도 바둑의 고수처럼 한 해를 돌아보는 ‘복기의 시간’이 필요할 성싶다. 내가 나에게 칭찬도 해 주고 실수했던 일들로부터 배우고 익히며 미처 갖지 못한 감사를 헤아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다 기억나지는 않겠지만 시간의 흐름을 떠올리다 보면 정말 중요한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일들을 지금이라도 알아낸다면 그래서 다시는 같은 실수나 후회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왔나 되돌아보면 오늘보단 내일이 더욱 더 나을 거라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릴 데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가면, 모퉁이 하나만 더 돌면 좀 더 나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 던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그 희망에 이끌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조금 더 뒤에 굉장한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 다독이며 십이월, 지금까지 우릴 붙잡고 온 희망에 기대 새날을 향해서 성큼 발을 내디뎌 본다.

“나는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무 번 미워했다/ 누군들 헌 옷이 된 생을/ 다림질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 오늘도 나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할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볕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힌다/ (…) / 남은 날,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미워할는지/ 아니면 어제보다 더 사랑할는지”

이기철 시인의 시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부분이다. 청춘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작아지고, 뒤처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오래될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때가 많았다. 경험은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귀중한 나만의 자산이 된다. 나이와 상관없이 늘 새로운 이야기로 채워지곤 하는 게 인생이 아닐까. 감사한 하루, 힘들었던 하루, 좋았던 하루, 슬펐던 하루, 다 그만두고 싶었던 하루,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 싶은 하루, 그 수많은 날의 하루하루가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던 생’이라는 대목에서 위로라도 받은 듯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십이월이다. 돌아보니 이 많은 하루가 뒤섞인 것 같은 날도 있고 정조준한 화살에 박힌 듯 아프기만 했던 하루도 있었다. 시인의 말처럼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물한 번 미워한다고 해도 우리의 하루는 누구에게나 귀하고 빛나며 소중하지 않았던 날은 없었던 것 같다. ‘서른 번 미워하고 단 한 번 사랑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모든 날이 살아있으니 받을 수 있는 눈부신 선물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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