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한국영화 새로운 100년을 위한 시작
[백정우의 줌인아웃] 한국영화 새로운 100년을 위한 시작
  • 백정우
  • 승인 2019.12.26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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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 배우와 스탭들.

올해 마지막 글이다. 대체로 한 해를 마감하는 원고는 지난 시간을 회고하거나 새해를 기대하는 덕담이기 마련이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으나 며칠 사이에 마음이 바뀌었다. 이유는 14일과 15일 연일 터진 배우의 폭로 때문이었다.

개봉을 앞두고 배우 윤지혜는 “이 영화는 불행 포르노 그 자체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자신이 출연한 ‘호흡’을 비판했다. 그는 촬영현장에서 겪은 힘든 일을 토로하는 수준을 넘어 “능력 없고 욕심만 앞선” 신인 감독과 그들을 지원하는 한국영화아카데미까지 공개적으로 저격했다.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촬영을 반복적으로 감행했고, 사전 허가 받지 않은 장소에서 도둑촬영하다 쫓겨났으며, 현장 통제도 지휘도 못한 채 컷만 외치는 감독놀음에 빠졌다는 게 윤지혜의 주장이다. ‘호흡’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권만기 감독의 졸업 작품이면서 장편데뷔작이다. 제작비 7,000만원의 저예산 영화다. 2017년 촬영을 마친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돼 뉴커런츠상을 받았고 몇몇 해외영화제에 초청된 것에 힘입어 어렵게 개봉일을 확정했다.이 상황에서 터진 주연배우의 폭로는 영화에 치명타가 되었다. 감독과 일부 스태프는 배우의 주장에 반하는 입장으로 알려졌고, 사태 파악에 주력하던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진상조사단 구성’을 알리고 사과했다.

지난 5월 25일 칸 국제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 100주년을 축하하는 최고의 이벤트이자 선물이었다. ‘기생충’은 한국영화 최초의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역사를 썼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영화는 제작 준비 단계부터 모든 스태프와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했고 주 52시간 근로조건을 지키면서 촬영한 최초의 사례이다. 2010년대 초반 도입되어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정착중인 표준계약서는, 스태프의 처우개선을 위해 4대 보험 가입과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하고 계약기간을 명시하며 주 52시간만 촬영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최근에는 ‘기생충’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계약조건을 준수하면서 영화를 찍고 있다. 그러니까 봉준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도 훌륭한 작품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1950년대 중반 세계 영화비평계를 휩쓴 작가주의 논쟁은 영화를 예술 범주에 편입시키는데 공헌했고, 대중문화 영역에 그치던 영화가 고급예술 관점에서 진지한 논의 대상까지 오르도록 만들었다. 당시 프랑스 평론가들은 영화사의 위대한 감독을 작가 반열에 올리고 추앙했다. 와중에도 잊지 않은 것은 개인의 창의성에만 초점을 맞춤으로 야기될 문제, 이를테면 영화가 생산되고 배급되어 상영되는 메커니즘을 숨기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이었다. 즉 감독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동안 배우를 비롯한 스태프와 업계 종사자가 소외당할 수도 있다는 부작용을 경계한 것이다.

윤지혜의 폭로 사태에 대하여 일부 매체에서 ‘미래의 봉준호’라는 표현을 썼다. 봉준호 감독이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이어서 만들어진 표현일 테다. 감독지망생이 미래의 봉준호를 꿈꾸려면 오늘의 봉준호를 정확히 알아야한다. 그것은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가 아니라, 근로기준법을 지키고도 황금종려상 수상작을 만든 봉준호이다. 한국영화 새로운 100년도 여기서 시작되어야 한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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