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冬柏), 성소(聖所)에 들다
동백(冬柏), 성소(聖所)에 들다
  • 승인 2020.01.0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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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새해,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되는 화두는 ‘나이’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나이를 매일매일 되새겨보진 않지만, 마음을 사로잡은 이에게 입을 맞춘 그 짧은 순간처럼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이 아닐까.

“세월 속에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보고 난 뒤/ 내 이마에 주름살들을 보고 난 뒤/ 난 그에게 대답했지/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사실 난 아무것도 세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내가 살아 온 세월에 대해선/ 그가 나에게 말했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설명해 주세요/ 그래서 나는 말했지/ 어느 날 불시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에게 나는 입을 맞추었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입맞춤을/ 나의 날들이 너무도 많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만을 세지/ 왜냐면 그 순간이 정말로 나의 모든 삶이었으니까”

‘나의 나이는 한 시간’이라는 스페인 시인 이븐 해임(Even Hazim)의 ‘나이’라는 시를 내 목소리로 읊으면서 ‘새해엔 이런 다짐으로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에 이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돌아보니 어쩌면 못 견딜 것처럼 힘겨웠던 그 순간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몇 해를 벼르고 벼렸던 만개한 동백을 제주도 ‘카멜리아힐’에서 얼마 전 만나고 왔다. 지난해 잘 견뎌왔다는 보상으로 새해, 내가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성악가들은 자기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눈이 와도 맘껏 맞지 못한다고 한다. 체중을 조절해야 하는 체조선수나 권투선수, 식이요법을 해야 하는 환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한파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임에도 아랑곳없이 바깥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이 있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 일부러 추운 곳에서 동계 훈련을 하는 선수들도 있다.

이처럼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 충실하기 위해 추위를 견뎌야 하는 것처럼 동백꽃 역시 겨울에 꽃을 피운다 하여 동백(冬柏)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겨울에 피는 꽃이 동백꽃뿐이랴 만, 동백은 다른 꽃들이 다 지고 난 추운 계절에 꽃을 피운다. 그토록 절절한 삶의 순간들도 결국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홀로 피어있는 동백이 조금은 안쓰럽고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동백, 그 붉은 꽃그늘 아래를 거닐며 ‘행복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치열할 수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동백꽃 뚝, 뚝, 떨어져 내린 자리가 온통 붉디붉다.”

동백은 수분을 도와줄 곤충이 없는 겨울에는 향기보다는 강한 꽃의 색으로 동박새를 불러들여 꽃가루받이하기에 번식하는 데 있어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다. 경쟁하는 식물이 별로 많지 않아 영양분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장점도 있다. 또한 겨울철이다 보니 곤충이 별로 없어 병충해 걱정도 덜하다고 한다. 이처럼 동백꽃에 있어 ‘블루오션’이란 바로 겨울이 아닐까 하는 역발상을 선물처럼 가슴에 새기고 돌아왔다.

첫사랑처럼 순정한 마음으로 시작한 2020년, 어제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날이 그렇듯 매일 주어지는 하루는 우리 인생에서 한 번밖에 없는 새로운 날이란 걸 안다. 첫날, 첫눈, 첫사랑, 첫 마음처럼 처음이 만들어준 설렘이 오래오래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설렘이 무뎌질 때마다 ‘나이’라는 시가 아름다운 삶의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십 원짜리 동전을 만들기 위해선 이십 원가량이 들고 이불 한 채를 만들기 위해선 무려 이만 송이의 목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무언가 마음에 드는 결실을 얻기 위해선 원하는 것보다 몇 배나 많은 수고와 그만큼의 땀이 필요할지 모른다. 우리의 꿈이 어느 방향을 향해 있던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생각 이상의 노력을 들여야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자리와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거기에 합당한 계획을 짤 수 있듯 중요한 것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얻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첫 마음’을 잃지 않는 끈기와 성실함을 오래도록 지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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