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하는 인생
음미하는 인생
  • 승인 2020.01.1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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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윤 SQ힉스아카데미 대표, 경영학박사
작년 연말, 가족과 함께 제주도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시사철 어느 계절이든 제주도의 풍광은 해외 어느 곳 못지않게 뛰어나다. 느긋한 여유가운데 제주도의 풍광을 음미하는 것은 여행의 큰 즐거움이었다. 최근에는 여행지의 이곳저곳을 바삐 이동하지 않고 한곳에 느긋하게 머물며 그곳을 찬찬히 음미하곤 하는데, 이것은 내가 최근에야 알게 된 여행의 특별한 즐거움이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곳에 머물면서 조용히 그곳을 즐기는 여행의 맛은 조금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는 여행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제주에서 음미하게 된 것은 비단 풍광만이 아니었다. 제주의 풍광은 오히려 덤이었고 특히 음미하게 된 것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막내 처제와의 관계였다. 이제 막 오십이 된 처제는 몇 년 전에 재혼하여 가족들과 다소 어색한 관계에 있었다. 더구나 동서되는 사람의 나이가 나보다 더 많아서 편히 얘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한번 보기로 하고 그 집을 방문하여 식사를 함께 했다.

처음 다소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함께 하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분위기는 무척 부드러워졌다. 술을 좋아한다는 동서는 우리를 위해 술 대신 고급 포도주를 준비하여 건배를 제의했다. 포도주의 향기가 어색한 우리의 관계도 음미하게 하였을까? 포도주의 향을 음미하며 꽤 많은 양의 포도주를 마셨다.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집에 마련된 노래방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튿날, 우리끼리 있는 시간에 아이들이 얘기를 꺼낸다. “아버지, 어제 포도주를 잘 드시던데요?” “그래. 평생 먹었던 포도주 보다 더 많이 마셨는데 별로 안 취하더라. 너희들도 어제 정말 노래를 잘 하던데?” “예. 이모와 이모부랑 좀 더 친해보려고 열심히 불렀어요. 저희가 열심히 부르니 두 분이 참 좋아하세요. 이모부도 참 좋으신 분 같더군요. 두 분이 행복해 보여 정말 좋네요. 저희들에게도 너무 잘 해 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요.”

제주도의 좋은 풍광과 음식을 음미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조금 어색했던 처제 부부와의 관계를 느긋한 시간 속에 음미하게 된 것도 이번 여행의 특별한 즐거움이 되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를 마주하여 음미하노라니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관계가 향기처럼 우리를 감싼 것이다.

제주도에서 돌아와 새해 다음 날, 투병 중인 지인 부부를 방문했다. 힘을 내라 격려했지만 병원 측의 진단은 심상치 않은 모양이다. 착하고 순해 보이는 그들 부부의 모습에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아들 녀석도 무척 마음이 아픈지 후배인 그 집 아들을 불러내어 함께 식사하며 이런 저런 위로를 하고 왔다. “아버지, 그래도 나을 수 있겠지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누구나 그런 상황에 부딪히면 그것마저도 음미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겠니?” 아들의 질문에 답하며 삶이란 누구나 겪게 되는 병과 죽음을 어떻게 음미하느냐에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서로 나누었다.

“아버지, 친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문상을 가 봐야겠어요.” 출국을 앞두고 짐을 꾸리던 아들이 전화를 받고 당황해 한다. 이십대 후반 나이의 우리 자녀들도 가족의 죽음을 인하여 인생의 고통을 음미해야 할 때를 맞는다. 제주도에서의 달콤한 행복이 아직 입 안에 남아 있는 듯한데, 크고 작은 인생의 쓴 맛이 서서히 입안으로 스며들어와 혀를 감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음미하는 것이다. 온 가족이 함께 하는 한 끼의 식사, 몸을 누이는 따뜻한 이불의 감촉, 부드러운 아이들의 살결, 친구와의 우정, 연인과의 사랑, 한 잔의 커피. 하늘 그리고 땅의 풍광. 이 모두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천천히 음미해 보아야 놀라운 것들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지인들이나 가족들과의 관계도 애써 모른 체하며 지나치지 말고 천천히 그것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천천히 음미해 보면 어색한 관계가 자연스럽고 친밀하게 바뀌게 된다. 삶의 맛과 보람이 거기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고통스러운 병과 죽음은 더욱 천천히 신중하게 음미해야 할 것 같다. 피할 수 없는 것은 음미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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