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움직이고 캔버스는 그것을 고스란히 기록한다. 나는 캔버스에 떨어진 나의 몸짓을 부인하지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럴 뿐이다. 그러나 가끔 내 행위, 혹은 내 단순한 몸짓의 기록인 캔버스는 나의 행위보다 우선하는 그들끼리의 질서를 보여준다. 이럴 때 나는 움찔하기도 하고 숙연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그들의 말을 내 행위를 통해 드러낼 뿐이라는, 그래서 나는 마치 신탁을 전하는 사제와 같이 자신의 의지는 조용히 내려놓는다. 누가 내게 명령하는지 모르겠다. 매 순간의 몸짓을, 색채를, 움직임을. 그러나 내게는 명료하다. 이 순간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소리에 순명해야 한다는 것.
나는 모르겠다. 진정으로 무용한 이 몸짓의 중첩이 하는 저 말이 그림의 말인지 아니면 내 말인지. 내가 진정 저것을 그리고 있는 주체인가 하는 끈끈한 의문도. 어쩌면 캔버스와 나는 서로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건네고 그것을 상대가 소리 내 주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사실 지칭은 하면서도 나는 그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모르겠다. 다만 나와 우주 사이에 한없이 열린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연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질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조미향은 영남대학교 조형대학원 졸업했다. 25회의 개인전과 30여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2년 사이미술연구소, 사이아트갤러리에서 ‘뉴디스코스 작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