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어느 날, 장마여
그리하여 어느 날, 장마여
  • 승인 2020.07.06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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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얼마 만이던가. 간만에 찾아온 햇살이 눅눅하던 일상에 생기를 더한다. 몇 날 며칠 세탁기 속에 들앉아 젖어있던 이불이며 옷가지들을 건져 올려 빨랫줄에 내다 건다. 햇빛 나는 그 잠깐 동안만이라도 마르기를 기다리며. 냉장고 속 과일이나 채소들은 짓무르거나 터져버린 부분을 도려내며 코로나 19로 인해 지친 내 맘속 꿉꿉한 생각들도 덜어낸다. 징검다리 더위를 건너온 장마 속 햇살 돋는 날이다.

장마를 대비하기엔 햇빛만 한 제습기가 없어 보인다. 바로 일조량이다. 일조량은 지표면에 비치는 햇빛의 양을 말한다. 언뜻 생각하면 추운겨울의 일조량보다 쨍쨍한 여름의 일조량이 많을 것 같지만 통계는 이와 다르다. 일 년 중 일조량이 가장 높다는 사월과 시월보다 칠월에는 일조량이 가장 낮다고 한다.

햇살을 오래 만지고 있을수록 기분이 들뜨고 그렇지 못할 때면 우울해짐을 느낀다. 더군다나 아직도 진행 중인 코로나 19까지 더해진 우울감은 극에 달한 듯 장마 속이다. 잦은 비와 두툼한 구름이 햇빛을 가리는 날이 많아지는 날일수록 일조권으로 인해 주변의 다툼이 잦아 보인다. 그만큼 일조량은 사람이든 식물, 우리 집고양이의 기운까지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며칠 전 딸아이가 수박 한 덩이를 낑낑대며 사 들고 왔다. 몇 번이나 ‘여름엔 수박이 제철이지’라며 사 달라 졸라댔지만 ‘장마철엔 일조량이 부족해 과일의 당도가 떨어진다.’라는 핑계를 대며 버티던 중이었다. 기대감으로 수박을 반으로 뚝 가르려고 하는 순간 질기고 두꺼운 껍질이 칼날을 꽉 문 채 놓아주지 않았다. 겨우 잘라놓고 보니 운송 과정에서 부딪히거나 치였는지 가장자리 일부가 이미 농한 후였다. 나이 든 여인네의 뱃살처럼 축 늘어진 채 탄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골 가계에서 산 것이 아니고 여름 한 철, 건너가는 트럭에서 산 것이라 바꿀 수도 없었다. 지나가는 소나기처럼 트럭은 쏜살같이 골목을 지나간 후였다.

과일은 아무리 보관을 잘한다고 해도 한 번 물러지기 시작하면 금세 제맛을 잃어버린다. 풋풋하고 아삭아삭한 처음의 상태로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여전히 거리 두기와 마스크사용으로 사람과 상황에 치이다 보니 어느새 신선함도 생기도 사라져 물러터진 마음만 남은 듯 보인다. 무른 자리를 찾아내어 그곳을 도려내거나 햇빛에 내다 널어 젖은 마음을 말려야 할 것 같다. 축대를 보수하듯 쉽게 치이고 무너지는 곳엔 완충재도 한 겹 더해 주면서 말이다.

‘아끼다 똥 된다.’라는 비유처럼 어느 집이나 냉장고 속엔 물러지기 시작하는 과일이나 빨리 먹지 않으면 버려야 할지도 모를 그런 채소 하나쯤 있지 않을까. 고이 모셔 두거나 귀한 손님이 오면 대접한다고 아껴두었지만, 오히려 다른 채소나 과일을 꺼내면서 더 많이 치이거나 받쳐 물러터진 것처럼 이 사람 저 사람, 이런저런 상황에 자주 치이다 보면 쉬 곪아터지기 십상인 마음 한 조각쯤 있을 것 같다.

‘비갈망’이라는 말이 있다. 꽃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쓰레기가 되듯 사람은 더 그럴 것이라 여겨진다. 더군다나 마음이야 말해 뭐할까. 때를 잘 맞추지 못하면 제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하더라도 잎 하나 가지 하나조차 피워내지 못한다. 오랜 삶의 장마에 상처받은 자리는 들어내고 우울한 마음을 볕살에 내다 말리는 일이야말로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좋은 일에는 마(魔)가 낀다는 속담처럼 장마를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고 싶다. 기쁨 아니면 슬픔, 슬픔 아니면 기쁨처럼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도 살아가는 것 또한 젖기만 하는 날도 마르기만 하는 날도 없을 것이다. 일조량이 자장 적다는 칠월, 한 달 만이라도 부족한 햇빛을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눈빛으로 채우면 어떨까.

장마 속, 후드득 장(長), 마(魔), 낀다. 비꽃 피기 시작한다. 다시 비설거지를 해야겠다. 빗나간 마음 다잡으며 분주하지 않게 바쁠 것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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