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낙원 2
실낙원 2
  • 승인 2020.09.1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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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엽 조정찬

찜통더위 기억
사라지기 전
으스스한 아침
고뿔 들었다

날씨는 제 길 간다
적응 못한 사람 탓

짧아졌어도
가을은 살아 있고
햇곡식 햇과일
풍성히 익어 간다

변덕이 죽 끓듯
들쭉날쭉 여론조사

지구 망하기 전
사람이 망하리라
니랑 공존하느니
코로나랑 살겠다는

일년을 하루같이
타오르는 불덩이들

◇ 조정찬= 1955년 전남 보성군 출생. 서울법대 및 대학원졸업. 21회 행시합격. 법령정보원장역임. 저서:신헌법해설, 국민건강보험법, 북한법제개요(공저) 등.

<해설> 어김없이 올여름도 더위를 팔러 왔고 우리는 부지런히 더위를 사들였다. 긴 세월을 땅 속에서 보낸 매미는 달포 남짓 세상 밖에서 오로지 번식을 위해 사력을 다한다. 매미는 생은 있지만 사실 없는 거나 다름없다. 더 슬픈 것은, 매미들은 그 고약한 숙명을 후대로 대물림하기 위해 태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처서, 칠석 지나고 추분이 다가오면 어느새 장사 같던 여름도 뒷걸음질 치고 뒤란 장독대 사이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더디 흐르던 시절엔 파도가 끝없이 밀려드는 같았다. 돌이켜 가슴을 펼쳐 보면 죽 끓듯 한 변덕들이 영혼의 샘이었다. 요즘은 지난 시절의 기억들을 흔들어 놓는 새로운 일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런 불덩이 같은 일들은 금방 익숙해지는 만큼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왜 그럴까? 스쳐 지나가는 타오르는 불덩이들엔 추억이 자라지 않고, 그 안에 이야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촉촉한 이야기가 없는 가을의 으스스한 아침은 가슴에 박힐 틈도 없이, 코로나 고뿔에 자리를 내어주다가 소리 없이 잊혀져간다.

짧아진 가을로 나이를 먹는 일이 맑은 거울 위에 김이 서리는 느낌이다. 시간의 흐름이 부쩍 빨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많은 것들이 머무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다. 머무름이 없기에 이야기도 없고 감동도 없다. 모든 것은 오로지 흘러흘러 흘러갈 뿐이다. 물론 그러한 흐름들은 순전히 우리들 선택의 결과이며, 다만 자유롭고자 함에 머무르지 못하는 까닭인 줄도 안다. 하여, 이 지구가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아직은 가을이 살아 있고 풍성히 익어 가는 햇곡식 햇과일이 있어 괜찮다.

파도소리 넘실거리던 모래사장 위로 발그레한 달이 뜨면 여름내 찜통더위를 이고 있던 솔숲이 밤바다에 멱을 감는다. 하얗게 부서지던 포말에 더위를 헹궈주던 갯가, 초록으로 타던 들녘 너머로 고래심줄 같은 여름이 갔다. 그러나 매미처럼 거듭거듭 허물을 벗어 봐도 도무지 자기가 드러나지 않는 생은 이미 태엽이 다 풀린 것일까. 어쨌든 우린, 올해도 여름을 사서 겨울을 파는 더위 장수 노릇을 훌륭하게 해내었다. 세상은 늘 기대처럼 흐르지 않는다. 그래도 기다림은 희망이다. -성군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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