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는 이미지 ‘너머’를 상상하게끔 만든다”
“텍스트는 이미지 ‘너머’를 상상하게끔 만든다”
  • 황인옥
  • 승인 2020.09.2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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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신라, 개념미술가 박창서 ‘From your memory’展
구름에 낯선 프랑스어 삽입
작품과 관람객의 거리 따라
때론 그림, 때론 텍스트 부각
이미지의 언어화 과정 구현
박창서 개인전
일시적이고 단명하는 경계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작업하며 경계 허물기를 시도하는 박창서 개인전이 갤러리 신라에서 29일까지 열리고 있다.

박창서작-From your memory
박창서 작 ‘’From your memory‘

세상이 아름다움만으로 점철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우리가 갈망하는 천국이 바로 그런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완전히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추하지만도 않아서, 인간은 그 둘 사이를 위태롭게 오간다. 어느 순간 추함이 아름다움을 끝간데없이 몰아 세울 때면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회복 하기 위한 강직한 행동에 나서고는 한다. 세상의 진보는 그런 역사 위에서 중첩되어 왔다.

흔히 아름다움을 논할 때 예술을 최전선에 놓는다. 아름다운 세상을 갈망하며 세상의 추함을 직시하고 변화를 위한 단초를 예술적 언어로 드러내는 예술의 본능에 따른 평가다. 특히나 예술의 위대성은 간접적인 화법인 예술작품을 통해 관람자로 하여금 스스로 문제를 자각하고 경계 허물기를 위한 행동에 나서도록 이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화법으로 추함을 논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이 역설이야말로 예술이 가지는 드라마틱한 서사인 것이다.

예술은 역사 이래 고착화된 유·무형의 경계에 작품이라는 실천적인 행위의 중첩으로 파문을 던지고 경계의 둑을 허무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해 왔다. 작가 박창서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예술의 역할과 밀착되어 있다. 그는 사회 내의 견고한 경계들에 파문을 던지며 경계 허물기를 시도해 왔다.

많은 작가들이 시각적 완결성인 ‘작품’ 자체에 주제를 집약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박창서는 좀 다른 결로 접근한다. 작업의 첫 순간부터 완결점까지의 여정에 의미를 분산하는 태도를 취한다. 작가가 던진 질문이나 제기했던 의문, 아이디어 그리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 등 작업 전반에 주제 의식을 심화한다. 그가 “취미로 미술을 하는 취미생과 미술을 통해 세계를 직시하는 작가를 구분할 때 우리가 들이대는 잣대가 무엇일까를 따졌을 때 시각적인 결과물만은 아니지 않느냐”며 반문했다.

“작품 속에 ‘무엇이 미술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빠져 있다면 작가로 대접 받을 자격이 없다는 철학을 가지고 작품에서 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시각적인 완결성보다 작업과정 전반을 미술의 핵심으로 인식한다는 측면에서 그는 개념미술가로 분류된다. 그중에서도 한 시대를 지배한 중심사조에 대한 반발의 역사인 서양미술사를 매체로 쓰거나 차용한다는 점에서 후기개념미술에 가깝다. 그는 서양미술사 속 작가들이 접근했던 방법론이나 개념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며 동시대 미술이 구획지어 놓은 경계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미술사는 개념미술의 보고임에 틀림없다. 굳이 새로운 방법론을 찾기보다 그들이 사용했던 방법론이나 질문을 개념적으로 차용하고 재생산하면 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컨텍스트에서 바라보는가’에 있다.”

지난달 28일에 개막한 신라갤러리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 ‘From your memory(당신의 기억으로부터)’는 언어로 인간의 형태를 묘사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 초현실주의의 오마주다. 불어에서 구름을 주제로 한 시나 글 또는 단어들을 무작위로 축출해 하나의 맥락으로 또는 분절적으로 연결해 놓은 텍스트와 구름 이미지를 조합해 구현한 회화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이미지와 언어의 관계성을 탐구한다.

“구름이라는 형상만 있으면 의식이 구름이라는 대상에 제한을 받지만 텍스트가 들어가면 구름 너머의 세상까지 확장이 가능하다. 구름을 그려놓고 태양에 대한 텍스트를 넣으면 구름 뒤편에 있는 태양을 떠올리게 된다.”

작가는 언어와 이미지를 필연적 관계로만 엮지는 않는다. 그는 이 둘을 동어 반복적이고 일의적인 관계로 접근하기보다 다의적인 관점으로 엮는다. 이번 전시작에서는 회색 구름의 이미지를 스프레이 물감을 이용하여 재현하고 그 재현된 이미지 위에 회색 구름에 관한 글들을 수집하고 편집해 아크릴 물감으로 적어놓았다. 구름의 이미지와 텍스트가 공존함으로 인해 작품과의 거리에 따라 이미지가 부각되기도 하고 텍스트가 더 잘 읽히기도 한다. “나는 이 거리감을 통해 이미지가 언어화되는 과정을 드러내려 한다.”

텍스트는 불어로 쓰여졌다. 불어를 선택한 것은 작가의 프랑스 유학 시기의 경험으로부터 왔다. 불어에 익숙하지 않던 유학 초기에는 불어로 쓰여진 간판 등을 접했을 때 의미 이전에 낯선 기호 이미지로 다가오다, 점차 뜻을 알아가게 되면서 익숙한 언어 이미지로 변하던 기억을 떠올린 것.

“마치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찰나의 경험이 낯선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경험과 닮아있어 불어를 텍스트로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은 동양인에게 익숙하다. 동양의 문인화에 이미지와 텍스트가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함께 한 역사가 있다. 21세기의 현대미술작가인 박창서가 텍스트와 이미지를 병행한 이유 역시 상호보완을 통한 미술의 확장성에 있다. “20세기 미술이 그림에서 기술적인 부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태도에 동의했다면 21세기 미술에 주어진 과제는 다양한 형식으로의 분화가 아닐까 싶어요.”

그가 바라보는 텍스트의 역할은 다의적이다. 그에게 텍스트는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전환하는 기제로 활용된다. 작가가 “구름은 계속해서 흘러가는데 내가 한 순간을 포착해서 그림으로 정지시켜 놓은 것이다. 모순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텍스트를 넣으면 모순을 보완할 수 있다. 텍스트가 개인의 순간적인 경험을 일반적인 경험으로 확장할 수 있게 이끈다”며 텍스트의 역할을 언급했다.

박창서의 작업에서 텍스트는 자주 활용되는 소재다. 과거나 현재에 존재했던 텍스트를 다양한 장소나 오브제, 또는 자연환경과 조합하며 재해석을 시도했다. 그가 “텍스트가 흥미로운 점은 물질적인 동시에 비물질적이며, 그 의미 체계가 투명하면서도 불투명하다는 이중성에 있다”며 텍스트에 무한 애정을 드러냈다.

텍스트로 구현한 대표적인 작품은 극재 정점식과 관련된다. 작가가 대학 재학 시기에 극재 정점식 당시 명예교수의 특강에서 받은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한 작품을 통해 극재의 작가적 자세를 환기했다. 극재의 텍스트는 극재와 동시대를 살았던 대만 작가의 텍스트와 조우하기도 했다. 서로 만난 적이 없는 두 작가를 편지를 주고받는 관계로 구현해 두 선배 화백의 궤적을 따라 갔다. 이를 통해 서양 미술이 수용되는 역사적 과정을 탐구했다.

“두 나라에서 추상화 1세대였던 걸출했던 선배 작가들의 정신을 환기하고 세대를 이어 계승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극재 선생님의 텍스트를 작품화 했다.”

개념미술이나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작가의 성향에서 철학적이고 지적인 면모를 유추할 수 있다. 개념미술이나 텍스트의 기반이 철학이나 지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 이러한 성향은 파리에서 박사학위 심사를 받을 때 이미 심사위원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일화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파리 1대학 팡테옹 소르본느에서 예술학(조형예술학)으로 심사위원 만장일치 찬사라는 최고 점수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그의 논문을 평가하며 “조형예술학분야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기다리던 최고의 논문 중 하나”라며 “박창서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철학적, 미학적, 미술사적 연구들과 연결되는 점이 자연스러우며 타당하고 풍부하고 깊이있는 결과물을 이루어냈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는 세상에 대한 관찰자, 예술에 대한 연구자, 그리고 시각적인 것을 생산하는 예술 생산자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서 세상을 예술의 언어로 연구하여 시각적인(지각적인, 감각적인) 무엇인가를 생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박창서는 일시적이고 단명하는 경계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작업하며 경계 허물기를 시도해왔다. 이번 갤러리 신라에 출품한 작품들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전 작업에서는 바다와 육지가 맞닿는 경계에서 밀려가고 밀려오는 파도를 따라가며 막대기로 선을 그어 해안선을 직접 드러내기도 하고, ‘새로운 다리’라는 의미로 지어진 퐁네프의 다리가 지금은 가장 오래된 다리라는 점에 착안해 인간이 개념화하고 있는 것과 실제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한계에 대한 질문을 펼치기도 했다.

“예술의 경계는 많다. 예술가는 계속된 질문을 통해 경계를 발견하고 허물어야 한다. 이것은 곧 세계의 발견이자 확장으로 이어진다. 경계를 허물고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다.”

작가의 관심사는 예술의 본질에 있기보다 예술이 점하는 위치에 있다. ‘지금의 현실에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예술가는 어떤 위치에 존재하고 해야 하며 무엇을 생산해야 할 것인가?’, ‘예술이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 어떤 것의 수단이 되지 않고, 스스로 목적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예술의 위치를 고민한다. “계속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넓혀 가는 것이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게 되는 동기가 되는 것 같다.”

전시는 29일까지 갤러리 신라에서. 문의 053-422-1628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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