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살인마·독가스의 아버지…그도 노벨상을 품었다
전쟁 살인마·독가스의 아버지…그도 노벨상을 품었다
  • 김종현
  • 승인 2020.10.2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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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노벨상을 품자 - (35) 대양의 거친 폭풍 속 통나무타기 학문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
1차 세계대전 때 독가스 개발
당시 사망자만 100만 명 넘어
1918년 노벨화학상 받았지만
비난 여론에 시상식은 못 열려
영국 물리학자 ‘프랜시스 애스턴’
1919년 질량분석기 제작 성공
동위원소 분리·원자량 측정 실험
모든 원소번호 규칙 표출 공로
노벨상-빵설탕
전쟁 살인마이면서 공기에서 빵을 만든 과학자로 알려진 프리츠 하버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림 이대영

◇전쟁 살인마, 다른 한편 녹색혁명의 창시자

1918년에는 유태인계 독일 화학자인 프리츠 하버(Fritz Haber, 1868~1934)에게 “화학원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한 공로(for the synthesis of ammonia from its elements)”를 인정해 단독수상자로 노벨화학상을 수여했다. 그는 나쁘게 말하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염소원소로부터 독가스를 개발하고 살포를 주도해 ‘독가스의 아버지(father of chemical warfare)’라는 별명과 ‘전쟁 살인마’라는 오명을 받았다.

그는 독일 브레슬라우(Breslau, 오늘날 폴란드 Wroctław)에서 부유한 유대인의 가정에 태어나 요하남초등학교(Johanneum School)에서 배웠고, 성(聖)엘리자베스 고전학교와 브레슬라우 김나지움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고등교육으로는 1886년부터 하이델베르크대학교, 1887년 베를린대학교 및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교에서 칼 테오도르 리버만(Carl Theodore Liebermann, 1842~1914) 교수의 지도 아래 유기화학 전공으로 1891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취득 후 연수과정(post-doc course)으로 1891년부터 1894년까지 예나대학교의 루트비히 크노르(Ludwig Knorr, 1859~1921) 교수의 연구조수로 연구를 했다. 1894년 카를스루에대학 연구원으로 전기화학 및 열역학과 같은 물리화학분야에 연구를 집중했다. 1898년에 카를스루에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1904년부터 질소와 수소를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생성하는 연구에 들어갔고, 1908년 저온고압으로 암모니아를 합성했다. 1909년 화학공업기업 바스프(BASF)와 계약하고 카를 보슈(Carl Bosch, 1874~1940)와 공동연구로 실용화 공정개발을 착수했다. 1913년 ‘하버-보슈공정(Haber-Bosch process)’을 성공했다. 이를 통해 질소비료를 대량생산하는 길을 활짝 열었다. 당시에는 ‘공기에서 빵을 만든 과학자(Scientist making bread in the air)’로 학계에서 추앙을 받았다. 오늘날 용어로는 식량증산에 기여한 ‘녹색혁명의 아버지(Father of the Green Revolution)’ 같은 획기적 연구였다.

그는 질소(N)를 이용해 질산(nitric acid, NO3)을 대량생산, 질산폭탄(질산칼륨폭탄, 질산암모늄폭탄)제조의 길도 열었다. 1911년 카이저빌헬름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Kaiser Wilhelm Institute for Physical Chemistry and Electrochemistry) 소장과 더불어 베를린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토 한(Otto Hahn, 1879~1968), 제임스 프랑크(James Franck, 1882~1964) 등과 같이 전쟁지원을 위한 화학무기개발에 앞장섰다. 소금을 분해한 염소(Chlorine)로 독가스를 제조하여 1915년 4월 22일 벨기에 이프르(Second Battle of Ypres)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직접 실험해 5천여 명의 프랑스군을 사망시켰고, 1만 5천여명을 중독시켰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독가스로 인해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발생하게 했던 전범자 혹은 ‘전쟁의 살인마(killer of war)’가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안 그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 1889∼1915)는 “과학적인 이상의 타락이며, 삶에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학문을 오염시키는 야만의 상징”이라고 남편을 만류시켰다. 그러나 10일 후 하버가 러시아군을 상대로 독가스 공격을 하러 출발(5월 2일)하는 아침에 남편의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죽어가는 아내를 아들에게 맡기고 눈썹 하나 아랑곳하지 않고 동부전선으로 나가 러시아 군대에게 포스겐(Phosgene) 독가스를 살포했다.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수용소(Auschwitz Birkenau) 등에서 유대인, 집시민족 및 전쟁포로 대량학살에 사용한 지클론 B(Zyklon B)란 독가스도 그가 연구하고 생산한 것이다.

대량학살은 1899년 헤이그 조약(Hague Convention) 정면 위반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이 패전하자 그는 전쟁범죄자로 지목되었고, 연합군의 수사망을 뚫고 스위스로 피신했다. 1918년 암모니아 합성법을 발견한 공적으로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비난이 많았기에 그해 시상식은 열리지 못했다. 1919년 격자에너지(lattice energy)를 연구해 ‘보른-하버순환과정(Born-Haber cycles)’에 대해 연구발표를 했으며, 패전독일의 배상금 마련을 위해 바닷물에서 금을 추출하는 연구를 진행했으나 함량과 경제성에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중단했다.

그런데 하버는 우리나라와는 악연을 갖고 있다. 일본제국이 독일군의 화학무기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참에 1924년 세계여행을 명분으로 그는 일본에 왔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일본군이 아니었다. 한국 흥남까지 방문해 일제가 감췄던 야욕(질소가스 등 화학무기)에 자문을 받아 1927년 조선흥남비료공장을 설립하게 되었다. 1933년 카이저빌헬름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 소장을 맡았으나 1933년 나치(NAZI)의 추방명령으로 캠브리지대학교로 옮겼다가,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의 바이츠만(Chaim Azriel Weizmann, 1874∼1952)이 설립한 다이엘시프연구소(Daniel Sieff Research Institute)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연구소 개소식에 참석하려고 이동하는 도중, 스위스 바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엎치고 덮친 험한 삶 속 자신의 인생은 디자인

1922년 영국의 물리학자이며 화학자인 프랜시스 윌리엄 애스턴(Francis William Aston, 1877~1945)에게 “비방사능원소에 있어 질량분광기와 동위원소에 의한 원소 구분과 모든 원소번호에 대한 규칙을 표출한 공로에 대해서” 단독수상자로 노벨화학상을 줬다. 그는 영국 버밍엄 하번에서 태어나 하번 비커러지 학교(Harborne Vicarage School)에서 교육을 받고, 우스터셔(Worcestershire)의 메이슨 대학(Mason College)이 소재하고 있는 하숙집 종사원으로 근무, 1893년 그렇게 갈망했던 메이슨 대학에 입학하는 행운을 얻었다. 당대 ‘포인팅의 정리(Poynting’s theorem)’로 유명한 존 헨리 포인팅(John Henry Poynting, 1852~1914) 등 교수로부터 화학과 물리학을 배울 수 있었다. 1896년 귀가해 아버지 집에 개인 실험실을 차려 유기화학에 대한 추가연구를 수행했고, 1898년 포스터 장학금(Forster Scholarship) 재정지원을 받아 에드워드 프랭크랜드(Edward Frankland, 1825~1899) 교수의 제자로 들어가 타르타르산(주석산)화합물의 광학적 특성을 연구했다.

밥벌이를 위해 버밍엄 양조학교에서 발효화학 작업을 하다가 1900년 버틀러 양조회사(W. Butler & Co. Brewery)에 채용되었다. 1903년 버밍엄대학교의 존 헨리 포인팅의 둘째 형인 프랑크 헨리 포인팅(Frank Henry Poynting, 1848~1897) 교수의 조교로 부름을 받아 모교로 돌아왔으나 곧 해직되었다. 연구를 지원하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의 험악한 현실 속에서 미래 삶을 디자인(to design future life)한다는 의미로 1908년 1년간 전화위복의 세계여행을 떠났다. 1909년 여행 도중에 모교에서 강사 자리가 나왔다고 연락을 받고 돌아와서 강사로 임명되었다. 1911년에는 1906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 교수의 초청으로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로 다시 옮겼다. 1914년 버밍엄대학 퍼시 프랭크랜드(Percy Faraday Frankland, 1858~1946)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종전되자 바로 캐번디시연구소로 돌아와 또다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1919년 질량분석기(mass spectrometer) 제작에 성공했고, 질량분해 및 질량측정 능력을 개선한 계측기를 개발했다. 이를 이용해 212개의 동위원소를 식별했다. ‘산소동위원소의 질량을 16을 기준으로 해 모든 다른 동위원소의 질량을 표출하는 정수규칙’을 만들었다.

저서로는 1907년 ‘음극 암(暗) 공간의 길이에 대한 실험(Experiments on the Length of the Cathode Dark Space)’, 1919년 ‘포지티브 광선 분광기(A Positive Ray Spectrograph)’, 1919년 ‘동위 원소 분리의 가능성(The Possibility of Separating Isotopes)’, 1920년 ‘원소의 질량 스펙트럼(The Mass-spectra of the Elements)’, 1922년 ‘동위원소(Isotopes)’ 및 1922년 노벨수상 연설이었던 ‘질량스펙트럼 및 동위원소(Mass-spectra and Isotopes)’등이 남아있다.

글·그림=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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