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39배, 시총 396배로…세계가 놀란 눈부신 성과
매출 39배, 시총 396배로…세계가 놀란 눈부신 성과
  • 김주오
  • 승인 2020.10.25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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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집념이 만든 삼성
반도체 사업 진출
1992년 세계 첫 64M D램 개발
메모리 강국 일본 최초로 추월
기술·생산 분야 세계 1위 등극
자만 경계하고 위기 대응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350시간 ‘신경영 대장정’ 토의
1996년부터 연평균 17% 성장
16라인반도체기공식참석한이건희회장
16라인 반도체 기공식 참석한 이건희 회장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만이다. 사진은 2010년 16라인 반도체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연합뉴스

중소기업과 공존공생 선언
“협력사 못 키우면 모체 죽어”
352개 품목 단계적 생산이전
신뢰 기반, 수평적 관계 지향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

삼성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묵묵히 꿈을 현실로 변화시킨 이건희 회장의 약속을 만나게 된다. 1987년 회장 취임과 더불어 선언된 그 약속은 당시 사람들에게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지만 세월 속에 하나씩 하나씩 실현됐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1987년 10조원이 채 못되던 삼성그룹의 매출은 2018년 현재 386조원을 넘기면서 39배 늘어났고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396배나 커졌다. 세계가 놀란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이건희 회장의 꿈과 약속이 있었다.

◇IT 강국의 초석을 마련하다

삼성이 IT 산업의 모태인 반도체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무도 삼성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974년, ‘TV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 일본보다 20, 30년 뒤쳐졌는데, 따라가기나 하겠는가?’.

이건희 회장이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했다.

지금이야 반도체 하면 ‘삼성’을 떠올리는 시대가 됐지만 그 때만 해도 한국반도체 인수는 말도 안되는 공상과 같은 이야기였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 하기도 했다.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꽃 피우기 시작했다.

삼성은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기록,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랐다.

반도체의 성공에 이어 애니콜 신화가 뒤를 이어받았다. 신경영 선언 이후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옵니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합니다.”

1995년 8월 마침내 애니콜은 전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였다.

◇위기 극복의 리더십, 미래를 열다

1992년 삼성이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 반도체가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세계무대에서의 1위라는 기쁨에 젖어있던 삼성. 그러나 단 한 사람, 이건희 회장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고 밤잠을 설치며 다가올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고민했다.

이건희 회장이 감지했던 위기가 닥쳐왔다. 1993년, 품질보다 생산량 늘리기에 급급했던 생산라인에서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모습이 사내 방송으로 보도됐고 파장이 커지면서 질보다 양을 앞세우던 기존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삼성 제품이 뛰어난 품질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이건희 회장에게 불량 세탁기 고발 영상이 담긴 사내방송 테이프가 전달됐다.

이를 본 이건희 회장은 그동안 쌓여온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을 내놓았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신경영 대장정은 총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천8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여시간의 토의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이 OECD 회원국에 가입한 1996년, 삼성은 연평균 17%의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성장일로에 들어선 삼성이 안심하고 기뻐하고 있을 때, 멕시코 티후아나 전자복합단지를 방문중이던 이건희 회장은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 하니까 자기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

이건희 회장의 질책과 함께 삼성은 내부 자만을 경계하고 장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삼성그룹은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 및 경비의 30%를 절감하겠다는 ‘경비 330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고,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사업에 집중하는 한편 경영 합리화와 사업재구축을 목표로 비상경영을 진행했다.

삼성이 비상경영에 들어간지 1년 후인 1997년, 대한민국에는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위기에 미리 대비하고 허리띠를 졸라맨 삼성은 외환위기라는 거센 파도 속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급변하는 세계 디지털 시장을 선점하는 기회를 만들어냈다.

◇상생과 동반성장으로 전진하다

이건희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88년, 삼성은 중소기업과 공존공생을 선언했다. 삼성이 자체 생산하던 제품과 부품 중 중소기업으로 생산이전이 가능한 352개 품목을 선정해 단계적으로 중소기업에 넘겨주기로 결정하면서 큰 화제가 됐다. 그리고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회장은 작게는 삼성의 발전을 위해, 크게는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위해 협력업체 육성을 다시 한번 역설했다. “삼성그룹의 대부분이 양산조립을 하고 있는데 이 업의 개념은 협력업체를 키우지 않으면 모체가 살아남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이건희 회장은 삼성 계열사들에게 신뢰에 기반해 협력회사와 수평적이고 전략적인 파트너 관계를 맺으라고 주문했다. 이에 따라 삼성에서는 ‘거래처, 납품업체, 하청업체’라는 말이 사라졌다. 그 대신 ‘협력업체’라는 표현을 쓰며 모두가 다 같은 삼성 가족임을 확인했다.

◇소프트 경쟁력을 강화하다

이건희 회장은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선언하고 디자인 경쟁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올해를 그룹 전 제품에 대한 ‘디자인 혁명의 해’로 정하고 우리의 철학과 혼이 깃든 삼성 고유의 디자인 개발에 그룹의 역량을 총집결해 나가도록 합시다.” 마침내 2002년 4월 혁신적인 디자인의 휴대폰 ‘SGH-T100’이 출시됐다. 이건희 회장은 이 제품 개발 단계부터 꼼꼼히 디자인을 살폈고 잡기 쉽게 넓으면서도 가볍고 얇은 디자인을 제안했다. 조가비 형태의 이 휴대폰은 ‘이건희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출시와 함께 큰 화제가 됐고 글로벌 1천만대 판매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윤삼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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