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자, 한국 2명 vs 일본 30명…이 차이, 무엇때문에?
노벨상 수상자, 한국 2명 vs 일본 30명…이 차이, 무엇때문에?
  • 김종현
  • 승인 2020.11.2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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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노벨상을 품자 - (40) 일본의 30人 ‘틈새프로젝트’
日학술진흥회 ‘JSPS’
노벨상 수상 목표 1932년 설립
세계 곳곳 11개 해외지부 설치
학자들 국제행사 학술발표 지원
노벨재단 세미나 참여기회 확대
물리학상 9명·생리의학상 8명
日 출신 외국인 포함 30명 배출
설립 87년만에 목표 달성 성공
노벨상-화학과생명
노벨화학상과 생명은 뗄레야 뗄수가 없다. 그림 이대영

1944년, 독일의 방사화학자 혹은 핵화학자인 오토 한(Otto Hahn, 1879~1968)에게 “중핵분열을 발견한 공로” 단독수상자로 노벨화학상을 시상했다.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Frankfurt am Main)에서 태어나 15세 때부터 화학에 관심을 가졌다. 1897년 프랑크푸르트(Frankfur)의 프랑크푸르트 암마인대학, 마르부르크대학, 뮌헨대학 등에서 화학과 광물학을 배웠으며, 부전공은 물리학과 철학이었다. 뮌헨대학의 아돌프 폰 바이어 교수 지도아래 3학기와 4학기를 배웠으며, 1901년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이소유제놀의 브롬유도체(On Bromine Derivates of Isoeugenol)’라는 고전적인 유기화학의 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년간의 독일군 복무를 마치고, 모교에 복귀해 박사학위 자문위원회 소속 테오도르 징케(Ernst Carl Theodor Zincke, 1843~1928) 교수의 조수로 일했다. 190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던 런던대학 윌리엄 램지(William Ramsay, 1852~1916) 교수의 불활성가스연구에 연구원으로 실험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오토 한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자 방사화학(radiochemistry)을 연구했다. 1905년에 토륨(radiothorium-228)이란 새로운 물질을 발견했다. 1913년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Kaiser Wilhelm Chemical Research Institute)에 들어가 32년 동안 오직 연구에만 몰두했다. 1921년 2월에 핵의 이성질화 현상(isomerism) 발견보고서를 발표했으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해를 못 했다. 1936년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가 이성질화현상을 다시 규명하자 인정하게 되었다. 1934년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와 중성자로 우라늄을 격발시키는 연구를 시작했다. 중핵이 중성자의 격발로 원자핵분열 할 때 여러 개의 큰 파편으로 분해(대폭발)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1938년 12월 16일에서 17일까지 2일간의 라듐·바륨·메소토륨·분열(radium-barium-mesothorium-fractionation)에 대한 결정적인 실험으로 수수께끼와 같은 문제는 풀렸다. 3개의 동위원소는 바륨(barium)이 아닌 단지 라듐(radium)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서 원자폭탄제조를 연구하다가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속칭 ‘알소스 특명(Alsos Mission)’으로 영국 캠브리지의 한적한 농가에비밀리 억류되어 조사를 받았다. 1945년 11월 16일에 비로소 자신이 1년 전(1944년) 우라늄 분열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1944년 노벨재단은 처음에 오스트리아 여성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 독일 물리학자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 1902~1980)과 독일의 방사화학자 한 등 3명을 노벨화학상 공동수상자로 지명했었다. 노벨상선정위원회(Nobel Prize Selection Committee)는 마이트너는 물리학자라는 이유로, 슈트라스만은 늦게 연구팀에 합류했다는 사유로 최종수상자에서 제외시켜 한에게 수상의 영광이 돌아왔다. 그런데 마이트너로부터 자신이 여성이기에 성적차별을 당했다는 이의 제기를 받았다.

◇일본학술진흥회 설립

한·일간 국력이나 자존심을 비교할 때 객관적 잣대로 노벨수상자 수를 제시한다. 우리나라는 노벨평화상 1인, 한국출신 미국국적인 노벨화학상 1인으로 두 사람이 한국태생이라고 하나, 일본은 일본국적 포함 25인이나 된다. 물리학상 9인, 화학상 8인, 생리의학상 5인, 문학상 2인 그리고 평화상 1인이 있다. 여기에 일본출신 외국 국적자 3인과 일본 관련출신의 외국 국적자 2인을 포함하면 30인이나 된다. 1932년에 이미 일본에서는 노벨상수상자 30인 배출을 목표로 일본학술진흥회(Japan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Science, JSPS)를 설립했다. 목표인원 30인으로 ‘틈새 파고들기 프로젝트’를 실시한 지 87년 만인 2019년에 30인 목표을 달성했다.

2018년 4월 제12대 일본학술진흥회(日本學術振興會) 회장에 취임한 수수무 사토미(1948년생)는 도쿄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한 외과의사다. JSPS의 연간예산은 2013년 현재 2천970억 엔(한화 2조 9천700억원)을 정점으로 2018년 2천614억 엔, 2019년도 2천671억 엔으로 약간씩 줄고 있다. 해외지부는 11개소에 설치되어 있으며, 가장 핵심지부(사무소)는 스웨덴 노벨재단 및 노벨상위원회 로비를 위한 스톡홀름지부이다. 나머지 지부는 정보수합과 재정지원을 위한 곳으로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본, 런던, 스트라스부르, 방콕, 북경, 카이로, 나이로비, 상파울루에서도 일본학문을 위한 진흥회지부가 운영되고 있다. 국제행사를 활용해 일본학자들의 학술발표를 지원하고, 심지어 노벨재단 학술세미나에 일본학자의 참여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이렇게 노력한 결과 2002년 노벨상시상식장은 일본을 위한 대향연회장이었다. “생물학적 거대분자의 질량분광 분석을 위한 소프트탈착 이온화방법 개발”의 공로로 일본인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 たなかこういち)가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동시에 “천체물리학의 개척자로서 공헌과 특히 우주 중성미자의 발견” 공로로 일본인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 1926년생)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되는 겹경사를 맞았다.

우리나라의 잣대로 이 두사람은 노벨수상은 고사하고, 직장에서 제대로 된 평가조차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나가 고이치(1959년생)는 흔한 박사학위 하나 없는 평범한 대졸회사원이고, 고시바 마사토시(1926년생)는 일본국립도쿄대학을 꼴찌로 졸업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지도교수로 노벨수상자를 찾아 대학 혹은 연구소를 쇼핑하는데 일본에선 유럽처럼 평생교육제도(life-long education system) 개념이 없어서 대학쇼핑은 불가능했다. 이런 틈새를 매우고자 일본에서는 일본학술진흥회(JSPS)를 설치했고 정보제공, 번역 및 학회 개최, 각종 지원활동으로 대성공했다.

1949년 일본인 원자물리학자 유가와 히데기(湯川秀樹, ゆかわひでき, Hideki Yukawa, 1907~1981)에게 “핵무기에 대한 이론적 연구에 기초한 중간자 존재를 예측한 공로”로 단독수상자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여했다. 이 결과를 뒤집어보면, 1932년 JSPS를 설립한 배경이 순수한 학문진흥이 아니라 원자폭탄 및 화생방 군사무기개발에 접목해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에 이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반도에 관련된 JSPS 활동을 복기해 본다면, 대마(大馬)로는 원폭·생화학무기 제조의 은폐였다. 즉, i) 1932년 히로히토 천황의 비밀프로젝트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 인근에 관동군 방역급수부, 일명 731부대(Unit 731)외 10여개 비밀생체실험부대 설치, 생물화학무기개발 및 생체실험을 비밀리 추진, ii) 1933년 교토제국대학교 원자물리학자 유가와 히데기(湯川秀樹) 원자폭탄제조 가능성 검토, 아인슈타인, 세실파월(Cecil Frank Powell, 1903~1969) 등 핵물리학자 자문, iii) 1934년 풍부한 석회암지역 용천에 원폭제조 기지화, iv) 1937년 10월 우라늄농축 전력공급을 위해 신의주 동북동 80km에 세계 최대낙차를 이용한 수풍수력발전소 건립, v) 1938년 흥남질소공장(1927년 이미 건립)을 화학무기제조창으로 개조, vi) 1940년에는 육군 제2호 비밀과제로 추진했다가 1945년 6월 들어 해군중심 핵융합연구(Fission Study)를 공개적으로 추진했다. 미·영국의 맨해튼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는 일본보다 늦은 1939년에 시작했지만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Trinity, 三位一體) 핵실험을 성공함으로써 20킬로톤 원자폭탄을 최초로 갖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원자물리학자 유가와 히데기는 일본 교토시에서 태어나 외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서양학문이라고는 겨우 익힌 영어로 런던 타임스(London Times)를 말년까지 구독했다. 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교토 제1중학교 때 별명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아 ‘꾸어다놓은 보리자루’라는 뜻의 곤베에(權兵衛)라는 호칭을 얻었다. ‘말 안 하겠다.’고 말해 이왕짱(イワンちゃん) 혹은 바보 이반(バカイワン)이라는 동료들의 평가를 받았다. 1929년 교토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겨우 연줄을 대어서 얻은 직장이 다마키 가주로 연구실 조수였다. 1932년 교토제국대학 강사와 1933년 오사카제국대학 강사를 겸임했다. 1933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원자의 핵엔 양성자와 중성자의 사이에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중간자가 있다’는 학설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1934년 중간자이론 구상, 1934년 JSPS 주선으로 스톡홀름 국제학회 개최에 참석해 “나는 산길의 끄트머리에 있는 소담한 찻집에 머물러 있는 나그네처럼 느껴졌다. 그 때는 눈앞에 또 다른 산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다.”고 자신을 소회했다. 1935년 소립자 상호작용에 대해 논문 발표, 1939년 솔베이 국제학회(Solvay International Society Meeting)에 참석, 아인슈타인 및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 1904~1967)와도 교류했다. 일본육군에서 추진해 온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945년 6월 해군중심으로 전환해 교토대학교 아라가스 분사구(荒勝文策, 1890~1973) 등에도 참여했다. 194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56년 1월 궁중가회(宮中歌會)에서 일본 특유단시(特有短詩)인 하이쿠(俳句)로 “어느 이른 봄 덤불이 무성한 길에 고르게 쌓여 투명하게 비치며 미처 녹지 않는 눈”이라고 자신을 회고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 공원의 와카바상에 단가(短歌)로 “원폭이여 다시 여기 오지마라!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만이다. 여기는!(まがつびよ ふたたびここに くるなかれ 平和をいのる 人のみぞここは!)”이라고 새겨져 있다.

글 = 정경은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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