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대륙에 나무 심고, 貧者에 무담보 대출 ‘평화 기여’
검은 대륙에 나무 심고, 貧者에 무담보 대출 ‘평화 기여’
  • 김종현
  • 승인 2021.01.1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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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노벨상을 품다] (46) 밀림복원, 일자리창조 및 경제평화 정착을
‘나무여성’ 왕가리 마타이
1977년 ‘그린벨트운동’ 창설
가난한 여성들과 식재 활동
아프리카 전역에 4천여 그루
서구로부터 삼림강탈 차단도
케냐 환경·천연·자원부 차관
노벨상-밀림복원
밀림복원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림 이대영

2004년 케냐의 여성 환경운동가이자, 아프리카 그린벤트운동을 창설해 생태, 사회, 경제, 문화적 발전과 평온을 되찾게 한 왕가리 마타이(Wangari Muta Maathai, 1940~2011)에게 “지속가능한 발전, 민주주의 및 평화를 위해 헌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단독 수여했다.

그녀의 이름은 스와힐리어로 ‘하쿠나 마타타’를 연상하게 했다. 즉 ‘라이온 킹(Lion King)’ 영화에 나오는 노래가사 ‘걱정 마, 문제없어(Don’t worry, No problem)‘를 연상시키는 ‘무타 마타이(Muta Maathai)’이다. 그녀는 케냐 은예리(Ihithe village, Tetu division, Nyeri District, Kenya)에서 태어나, 14살 때 가톨릭교 선교회 운영 세인트 세릴리 중학교에서 4년간 배웠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존 케네디 재단(Joseph P. Kennedy Jr. Foundation)에서 실시한 300명의 장학생에 선발되어 1960년 9월 미국 대학을 가게 되었다. 1964년 미국 캔자스 마운트 세인트 스콜라스티카 대학(Mount St. Scholastica College , present Benedictine College)에서 생물학을 전공, 1966년 피츠버그대학교 생물학 석사학위를, 1967년 라인홀드 호프만 교수가 제안한 학문탐색여행(Academic Discovery Travel)으로 독일 기센대학(University of Giessen)과 뮌헨대학(University of Munich)에서 2년간 배웠고, 1969년 봄에 귀국해서 나이로비대학교(Nairobi University)에 박사과정을 등록해 1971년에 수의학 박사학위(Ph.D. veterinary anatomy)를 받았기에 당시 동아프리카 최초 여성 박사학위 소유자였다. 1976년부터 2년간 나이로비대학교 최초 수의학 교수와 학장까지 역임했다.

한편 1977년 1천 200만 그루 나무심기 하람비(수풀)왕국을 구하자(Save the Land Harambee)라는 슬로건으로 환경단체 ‘그린벨트운동’을 케냐에 창설, 아프리카전역에 나무심기운동을 전개해 나무여성(Wood Female : 평생 4천 5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여성)이라는 애칭을 받았다. i) 아프리카의 밀림을 회복하자는 것, ii) 가난한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로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로 이름이 알려졌다. iii) 1986년 전(全)아프리카 그린벨트네트워크(Pan African Green Belt Network)를 확대, 우간다(Uganda), 말라위(Malawi), 탄자니아(Tanzania), 에티오피아(Ethiopia) 등으로 확산에 성공했다. iv) 2003년까지 아프리카 각지 마을, 학교, 교회 등에서 심은 나무만 3천만 그루가 넘었고, v) 24년간 케냐를 독재했던 아랍 모이(Daniel Arap Moi, 1924년생) 정권에 수차례 체포 수감되었다. vi) 케냐 전국여성위원회 위원, 국제연합 사무총장의 군축자문위원에 선발, vii) 1998년 ‘2000년 연대(2000 Year’s Solidarity)’를 결성해 아프리카 빈국의 이행불가능 채무를 2000년까지 탕감하고 서구자본으로부터 아프리카 삼림강탈을 막자는 운동(Movement to prevent the robbery of African forests from Western capital)을 전개했다. 1997년 대통령선거 낙선, 2002년 98% 지지로 국회의원 당선되었다. 이에 케냐 ‘환경·천연·자원·야생·생물부’ 차관에 임명되었다.

저서로는 1994년 ‘바닥은 너무 무겁다 : 심지어 그린벨트운동(The bottom is heavy too : even with the Green Belt Movement)’, 1995년 ‘아프리카 개발의 병목현상(Bottle-necks of development in Africa)’, 2004년 ‘그린벨트운동 : 접근과 경험공유(The Greenbelt Movement: Sharing the Approach and the Experience)’, ‘세계 소수계의 현황(State of the world’s minorities)’, 2009년 ‘아프리카를 향한 도전(The Challenge for Africa)’, 2010년 ‘지구 보충하기(Replenishing the Earth)’등을 출판했다.

◇호주머니 단돈 27$로 빈곤퇴치 신용은행을 설립

무함마드 유누스
우연히 고리대금업자 횡포 목격
소액 대출 ‘마을금고사업’ 추진
이후 ‘무담보’ 그라민은행 설립
1년 회수율 99%, 한 때 흑자도
극빈자 600만명 중 58% 구제

2006년 방글라데시 출신 은행가, 대학교수인 무함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1940년 생)와 그가 설립한 지역사회개발 금융기관인 그라민 뱅크(Grameen Bank, 1983년생)에 “밑바닥(아래)에서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룩하고자 노력한 공로에 대해(for their efforts to create economic and social development from below)”공동수상자로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무함마드 유누스는 방글라데시 치타공 바투아(Bathua, Chittagong, Bangladeshi)라는 마을의 보석세공업으로 유복하게 사는 무슬림 가정 9남매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1950년 치타공대 고등학교(Chittagong Collegiate School)에 다니면서 3만 6천명 학생 가운데 16위를 했다. 보이스카우트대원으로 1952년 서파키스탄 및 인도, 1955년 캐나다 등지의 잼버리대회(Jamborees)에 참석했다. 1960년 다카대학교(University of Dhaka)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풀브라이트 장학금(Fulbright Scholarship)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했다. 1969년 밴더빌트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2년까지 미들테네시 주립대학교(Middle Tennessee State University)에서 경제학 조교수를 역임했다. 1972년 귀국해 치타공대학교 경제학 교수를 역임했다.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인구밀도와 빈곤이란 현실 속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건 고뇌(苦惱)뿐이지, 삶에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었다. i) 1973년 대학 인근 조브라 농촌마을(agricultural village of Jobra)을 갔다가 단돈 20달러 때문에 고리대금업자의 횡포와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는 참혹함을 봤다. 당장 할 수 있는 호주머니 속 단돈 27달러를 돈이 필요한 이웃에게 빌려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했던 게 바로 거창한 무담보신용소액대출 즉 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credit)의 효시가 되었다. ii) 1976년 대학교수인 자신의 명의로 은행에 돈을 빌려 빈자(貧者)들에게 소액대출하는 ‘마을금고사업(Grameem Bank Project)’을 추진했다. 1979년까지 500여 가구가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 iii) 1983년 방글라데시 다카에 본사무소를 둔 ‘그라민은행(Grameen Bank)’을 법인으로 설립·등록해 본격적인 무담보대출을 개시했다. 1982년 2만 8천명에서 2007년 700만 명으로, 1983년 회수율이 99%, 1993년에 흑자경영구조를 다졌다. 여태까지 집계를 내어보니 극빈자 600만여 명 중 58%나 구제되었다는 통계수치를 얻었다. iv) 지역개발금융기관에서 벗어나 국가 및 지구촌 빈곤퇴치 운동으로 확대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정보의 빈곤으로 벗어날 수 있는 그라민폰(Grameen-phone), 어린아이들에게 유기농산물을 제공하는 그라민 농업(Grameen Krishi) 등으로 사회성장과 변화에 맞는 신생수요기반의 새로운 사회사업(social work)을 전개했다.

그의 저서로는 1974년 ‘조브라의 농부 3명(Three Farmers of Jobra)’, 2007년 ‘빈곤 없는 세계 만들기 : 사회사업과 자본주의의 미래(Creating a World without Poverty : Social Business and the Future of Capitalism)’, 2010년 ‘사회구축 : 인류의 가장 중요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형’ 및 2017년 ‘3 제로 세계 : 빈곤 제로, 실업 제로 그리고 탄소배출 제로의 신경제(A World of Three Zeroes : the new economics of zero poverty, zero unemployment, and zero carbon emissions)’ 등이 남아있다.

최근 마이크로 크레디트운동(Micro-credit Movement)은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에선 ‘신나는 조합(Joyful union)’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고, 아프가니스탄, 카메룬 등 37개국에 지점이 있다. 2005년 국제연합(UN)에서는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해(The Year of Microcredit)’를 기념했다.

지역사회개발 신용금융운동(community-Development credit finance Movement)은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다. 그라민뱅크운동 이전 1950년 혹은 1960년대부터 시작했던 신용협동조합과 새마을금고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지역사회개발, 빈곤서민의 경제활동에 기여한 공이 지대했다. 그럼에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지 못한 건 발상의 한계였다. 즉 i) 장소범위가 국내에 제한되었으며, ii) 사업범위가 금융영업에만 집중되었고, iii) 지구촌 빈곤퇴치(Global Poverty Reduction)라는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글=정경은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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