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근대미술 조명…지역 예술인의 이상·시대정신 엿보다
대구근대미술 조명…지역 예술인의 이상·시대정신 엿보다
  • 황인옥
  • 승인 2021.04.04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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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미술관 10돌 기념 ‘때와 땅’展
1920~1950년대 예술행적 다뤄
진화하는 문화 외형 총체적 고찰
이인성·이쾌대 걸작 ‘한 자리에’
향토회 등 양화 단체 활동상 등
미술계 특징 따라 5개 섹션 구성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도 공개
이인성 작 '가을 어느날'. 대구미술관 제공
이인성 작 ‘가을 어느날’. 대구미술관 제공

대구미술관 박민영 큐레이터
박민영 큐레이터가 전시작인 이쾌대의 작품 ‘군상 (해방고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구근대미술이 한국근대미술의 중심이었다는 이야기는 익히 전해 들었지만, 정작 실체적 자료들을 만날 기회는 드물었다. 이인성이나 이쾌대 등 대구가 낳은 대한민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걸출한 근대화가들의 작품을 제한적으로 감상하며, 대구미술의 위상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대구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특별 기획한 전시 ‘때와 땅’전은 대구근대미술의 우수성을 실체적이면서도 방대한 자료로 입증한 첫 전시라는 데 의의를 가진다. 예술이라는 제한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기보다,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구근대미술의 위상을 정립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대구근대미술의 시기는 서양식 화구가 들어와 새로운 미술이 시작된 1920년대부터 전쟁의 상흔을 극복해 가는 1950년대까지로 정했다.

전시 기획을 맡은 대구미술관 박민영 큐레이터는 “대구의 자산인 대구근대미술 자료들이 더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정립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이번 전시가 기획됐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한국의 근대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파란 속에서 전개됐다. 이 시기는 개화와 선진에 대한 희망보다 울분과 파란의 암울한 정서가 지배했다. 서양미술의 국내 전파 역시 일제강점기라는 국난 속에서 진행됐지만 대구근대미술은 침략국인 일본으로부터 전해진 새로운 미술을 일본으로부터 나라와 정신을 지키려는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다. 서양미술을 ‘민족정신’과 ‘시대정신’을 결집하고 전파하는 장치로 활용했으며, 그들 스스로는 이상을 실현하는 실천가를 자처했다.

“질곡의 역사와 함께 시대를 일구었던 대구 근대 미술인의 행적과 지난한 극복, 그리고 그들이 꿈꾼 예술의 이상과 시대정신을 이번 전시에 담고자 했다.”

대구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특별 기획한 전시 ‘때와 땅’전은 대구근대미술에 흐르는 고고한 시대정신을 직시하고, 대구미술의 뿌리인 대구근대미술의 유전인자를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하는데 의도를 두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역사적 자산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다행히 대구는 그런 자산이 많다. 이번 기회를 통해 대구근대미술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기술하고자 했다는데 의의를 두고 싶다.”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를 100%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객관적인 자료와 당대인들의 구술 자료를 통해 보다 입체적인 역사로 정립될 수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자료를 확보했느냐가 관건이다. 과거로 시선을 돌리기에 시간이나 심리적 거리는 너무 멀고, 오직 자료만이 근대미술사의 신뢰를 담보해 주기 때문이다. ‘때와 땅’전은 단편적인 자료가 범할 수 있는 시야의 한계를 극복하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실체적 진실을 확보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이런 기조는 자료 확보 행보를 전국으로 확대하게 했다. “20~30년 전 만해도 존재했던 작품이나 자료들이 사라지기 전에 대구근대미술의 작품과 자료를 수소문하고 수집하는 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발굴한 자료들 중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대구 서양화의 도입자인 이상정이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담았던 ‘벽동사’ 취지문이다. ‘벽동사’ 취지문은 지금까지 전설로 회자됐던 이상정의 예술정신을 역사적 사료로 거듭나게 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됐다. “매일신보에서 이상정 벽동사 취지문을 발견했다. 그 취지문을 통해 이상정의 이상이 무엇이었으며, 어떤 활동을 지향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오세창 문고에 수집되었던 ‘청람인보(청금산방금석고)’(1935)은 이상정의 전각 인보집으로, 이번에 새롭게 발굴한 자료다. 이 자료의 이본인 ‘청금산방인원’(1936)은 희귀본으로 대구의 개인 소장가를 설득해서 확보했다. 향토회의 멤버인 서병기의 작품 또한 그의 작품을 취급했던 갤러리를 거쳐 안동의 소장가로부터 확보했다. “발로 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전국을 샅샅이 뒤져서 몇몇 자료들을 새롭게 얻을 수 있어 기뻤다.”

전시는 총 다섯 개의 주제별 섹션으로 구성했다. △대구에 유입된 서양미술이 전통서화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대구근대미술이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향토회나 대구미술사 등의 양화 전문 단체들의 활동 △근대미술 성장의 요체인 사제관계와 교육 △대구근대미술의 백미인 ‘이인성과 이쾌대’ △ 피난지 대구의 예술 등 대구근대미술을 꽃 피우게 한 사회문화적 토양과 실천 등이다.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접근했던 대구근대미술의 역사를 당대 작가들의 작품과 그들이 활동했던 단체, 사제관계, 아카이브 등 광범위한 자료들로 체계적으로 엮어내려 했다.”

첫 번째 섹션에서 주목할 부분은 서양미술이 대구에 유입되던 초기에 전통서화와 서양미술이 서로를 인식한 태도다. 당시 두 이질적인 장르는 서로를 갈등관계에 두지 않았다. 한국미술이라는 대주제로 서로를 이해하려는 협력관계로 접근했으며, 이 시기의 교류 협력적 태도는 이번 전시된 죽농 서동균과 이인성의 합작도에 잘 드러난다.

“이 시기는 서화와 양화를 미술이라는 종합적인 틀로 묶고자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서화가와 양화가들이 같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서화가 양화의 영향 받고 양화가 서화의 영향을 받으며 서로 흡수하고 자극받았다는 당시 분위기를 반증한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런 분위기를 알게 됐다.”

되풀이되는 역사 속에서 후대가 선대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은 역사 정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좋은 역사이면 적극 본받고, 좋지 않은 역사는 교훈으로 삼자는 의미가 숨어있다. 대구미술관이 이번 전시에서 집중한 교훈은 대구근대미술의 사회적 역할이다. 대구근대미술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국난에 맞서 리더의 역할을 자처했다. 이들은 ‘시대정신’과 ‘민족정신’으로 중무장하고, 그들이 주창하는 시대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민족의 역량을 집중하는 선봉에 섰다.

박 큐레이터는 “대구 근대 작가들이 그들의 이상을 모두 실현하지는 못했더라도, 그것을 목표로 두고 예술을 통해 실천하려고 했다는 바로 그 지점에 대구미술의 독특성과 차별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 당시 혁신성이 문화예술 통해 드러났다. 지금보다 사회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컸다. 근대미술의 시작을 단순하게 작품으로만 보게 되면 그 시대 예술가들의 사회적 역할을 놓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근대작가들의 실천가이자 러더적인 면모는 두 번째 섹션에서 잘 드러난다. 이 섹션에는 이 시기 미술 리더들이 향토회나 대구미술사 등의 단체를 통해 미술전문교육기관 역할을 자처했고, 이를 통해 자신들이 추구했던 이상들을 실천해간 활동들이 담겨있다.

이번 전시에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세 번째 섹션이다. 이 섹션에서는 최초로 이인성과 이쾌대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의 작품을 비교 감상할 수 있게 했다. 나란히 전시된 두 작가가 시대정신을 지향했다는 유사성을, 형식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는 이질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인성이나 이쾌대의 작품 세계가 그들 혼자만의 결실만은 아니었음이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예술가를 성장시키고자 했던 대구의 토양이 이인성의 후원자를 자처했고, 이쾌대는 그의 형인 이여성의 영향을 받았다. 이번 전시에는 두 천재의 작품 세계를 확인하는 작품들이 소개된다.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에서 대여한 근대 걸작 이인성의 ‘가을 어느날’(1934)과 ‘경주의 산곡에서’(1935) 두 점과 이쾌대의 유족에게 대여한 대작 ‘군상Ⅰ’(1948)과 ‘군상Ⅱ’(1948) 등이다. “이인성이 은유적으로 주제를 표현했다면, 이쾌대는 사회성 짙은 리얼리즘계열로 접근했다.”

대구근대미술의 뿌리를 전방위적인 차원에서 조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해당하는 섹션은 네 번째 섹션이다. 이 섹션에서는 대구근대미술을 스승과 제자라는 계보로 집대성한다. 근대화가들이 일본 유학을 통해 양화를 공부했고, 점차 국내 고등 미술교육기관에서도 양화가를 양성한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이번 전시에는 박명조가 거쳐간 이시이 하쿠테이 화숙에서부터 동경미술학교 고바야시 만고의 교실에서 수학한 서진달, 그리고 대구사범대학교 다카야나기 다네유키로부터 배운 금경연, 권진호, 김수명, 강홍철에 이어 대구계성학교 서진달의 제자들인 백태호, 김우조, 추연근 등의 계보를 정리했다.

“미술은 항상 그 전 시대, 아니면 동시대 다른 지역 미술의 영향 받아왔다. 그러나 대구근대미술은 아직까지 그런 논의들을 하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사제관계를 통해 대구근대미술의 관계성을 확인해 보려 했다.”

대구근대미술은 양화의 유입 이후 환경과의 상호작용 사이에서 변화하고 수용하며 성장해왔다. 특히 대구근대미술은 여느 지역보다 유달리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했다는 역사적 뿌리를 독특성으로 하고 있다. 그 독특성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박 큐레이터는 “근대 작가들과 현대 작가들이 무관할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지역사회의 이슈를 개인의 이슈로 생각하지 않고 전체의 일로 생각하는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연속성을 가지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번 전시에는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도 모았다. 근대기 대구문화공간을 해방 전후로 나누어 현재의 대구와 비교해 볼 수 있는 문화지도와 인물지도를 구축하고, 1920년대와 1950년대 사이 예술가들의 행적을 보여주는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도 모았다. 특히 ‘대구근대미술을 지킨 사람들’을 주제로 작가들의 유족 인터뷰와 대구 1세대 미술사가인 권원순의 인터뷰를 통해 대구근대미술이 이어온 과정을 담아낼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박민영 큐레이터의 역할이 컸다. 박 큐레이터가 18년간 대구문화예술회관에 재직하며 대구근대미술 관련 전시들을 몇 차례 기획하며 축적된 지식과 정보들이 이번 전시에 십분 활용됐다. 그녀는 이번 전시가 대구근대미술사를 시작하는 포문이 되기를 희망했다. “소중한 자료들이 흩어져 버리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이번 전시에 최선을 다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전시 이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모쪼록 이번 전시가 대구근대미술에 대한 연구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본다.” 전시는 5월 30일까지.

황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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