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문화재 지킴이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대구논단>문화재 지킴이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 승인 2010.08.22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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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흥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최근 경술국치 100년, 해방 65주년을 맞아 나오토 일본 총리가 `조선왕실의궤’ 등을 한국 측에 인도할 방침이라고 일본의 한 신문이 보도했다. 현재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왕실의궤는 `명성황후 국장도감’ 등 81종 167책이라고 한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 문화재의 반환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기본 입장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문화재 관련 기본 규정이 이미 완결됐다고 보고 있다. 또한 반대세력과 개인적으로 구입한 물건에 대한 반환은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 등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는 약 10만 7,857점이라고 한다.

이중 불법 유출된 문화재가 집중적 환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유물 환수에 대한 시각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정부기관의 장기적 대책 없이 시민단체의 열정에 의존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 인물이 부각되고 있다.

1935년 봄 청자 하나를 두고 일본인 골동품상 마에다와 조선인 청년 사이에 흥정이 시작되었다. 이 일본인 골동품상은 조선총독부가 새로 만든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1만 원을 주고 사겠다고 하는 것을 거절하고, 이 청년에게 매병의 값으로 2만 원을 제시했다. 그러자 막 서른을 넘긴 조선인 청년은 흥정 한 번 하지 않고, 제시한 돈을 그대로 지불하고 청자를 구입했다.

그가 지불한 2만 원은 당시 경성(현 서울) 시내 8칸짜리 기와집 스무 채 값이다. 현 시세로 계산하면 약 6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 청년은 우리 문화재가 외국으로 반출되는 것을 안타까워 많은 재산을 투입하여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조선인 청년의 이름은 `간송 전형필(이충렬, 김영사, 2010)’이며, 그가 구입한 것은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 간송미술관 소장)이다.

그는 증조 때부터 배오개(지금의 종로4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 부호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 종형 월탄 박종화의 민족정신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거의 전 재산을 들여 문화재 수집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우리 미술사에서 큰 봉우리인 추사 김정희와 겸재 정선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또한 심사정·김홍도·장승업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가와 서예 작품까지 총망라했다. 고려 및 조선 자기와 불상·불구·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재들을 방대하게 수장했다.

그는 시중 가격보다 2~3배의 웃돈을 얹어 주면서 일본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한 문화재를 돈에 구애받지 않고 구입했다. 일본까지 가서 직접 사 오기도 하고, 일본으로 반출되기 직전 항구에서 구입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유출된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되사온 것으로 유명하고, 심사정의 대작 `촉잔도’는 보존 상태가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거금을 들여 사온 후, 일본으로 보내 그림 가격만큼 많은 돈을 들여 보수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개인적 취향보다는 민족문화사에 필수적인 것을 모았다.

그가 구입한 것 중에는 국보 제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 해례본도 있다. 이 책은 1956년 연구를 위해 영인본으로 출판되었고, 이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는 국보 12점, 보물 10점, 시울시 지정 문화재 4점이다. 해마다 개최되는 간송미술관의 전시회는 국보급 유물이 전시됨에도 관람료를 받지 않는다.

그는 문화재를 보관하기 위하여 박물관을 지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개인이 박물관을 건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북동에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이름의 보화각(?華閣)을 건축,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했다.

이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서적 수집을 위해 한남서림을 경영하거나, 인재 양성을 위해 동성학원을 설립,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 교육 사업에 몰두했다.

그는 소장 문화재를 6·25전쟁 중 부산으로 옮겼다가 서울 수복 후 불길한 예감이 들어 미술품을 서울로 옮긴 직후 부산 보관창고에 불이나 건물이 전부 불타 버린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는 전혀 발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간송의 위치는 더욱 빛난다. 일제식민지 시절 많은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거나 사라졌지만 그래도 우리 것을 지키려는 간송 같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해외문화재에 대한 환수가 감정적이 아닌 국가적인 체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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