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웃음과 품위를 갖춘 건배의 말씀을
<대구논단> 웃음과 품위를 갖춘 건배의 말씀을
  • 승인 2009.02.1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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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열
한국정치평론가협회장

술자리에는 언제나 웃음이 그치질 않는다. 대부분 기분이 좋아서 한잔 걸치기 때문이다. 기분이 나쁘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에도 술을 마시게 되지만 그런 일보다 평상시의 술자리는 기분이 좋을 때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술자리에서는 의례 건배를 권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단 몇 사람만 둘러 앉아있어도 잔을 부닥치며 건배를 한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여기에는 말씀이 따라다닌다.

“----을 위하여!”가 통상 쓰인다. `위하여’가 군사문화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별다른 거부감 없이 오랫동안 쓰여 왔다. 어떤 사람은 위하여의 `여’를 `야’로 외치기도 한다. 여당만 위해선 안 된다는 발음으로 만들어낸 유머다. 거나하게 한잔 들어간 기분에 너도나도 건배를 외치다보면 갖가지 말들이 다 나온다. 단순히 `건배!’하는 것도 자주 등장한다. `축배’도 간혹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건배의 말을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다양하지는 않은듯하다. 세계에서 가장 술을 많이 소비하는 나라로 지목된 나라답게 술자리 매너도 다양하기 그지없다. 중국과 왕래가 많다보니 배워온 듯 한데 술을 단번에 쭉 들이 킨 다음 술잔을 엎어 머리 위에 붓는 시늉을 내는 이들도 더러 있다. 잔을 비웠다는 뜻이다. 건배(乾杯)라는 말이 원래 잔을 말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건배에 충실한 행동이다.

영어를 사용하여 `원샷’을 외치는 이들은 그나마 위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일까. 이런 술자리 풍경 속에서 우리는 웃음과 혜학을 교환하며 그 자리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술이 몇 순배 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이 풀어진다. 절제하고 긴장했던 분위기나 서먹서먹했던 마음들도 한풀한풀 벗겨진다. 말이 많아지고 눈이 게슴츠레 풀린다. 평소에 점잖던 사람도 달라진다. 거칠고 목소리가 커진다.

건배를 외치는 말도 더욱 다채로워진다. `세우자!’를 전용으로 쓰는 친구도 있다. 처음 시작하는 말은 그럴듯하다. “나라의 경제를 바로 세우고, 땅에 떨어진 도덕과 예절을 옳게 세우며”까지는 멋지다. 그 다음은 “거시기도 세우자!”다. 이 대목에서 웃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시기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표현성 때문에 그 의미를 대충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때 `거시기’가 특정 지역의 사투리로 오해받은 일도 있었지만 국어학자들의 연구결과 확실한 표준어라는 발표까지 나올 정도로 거시기의 용도는 넓고 크다. 아무튼 거시기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에 딱 들어맞는 건배의 말이기 때문에 남여노소를 막론하고 “세우자!”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이번 2월16일에 우리는 뜻 아닌 비보를 접했다. 병중에 있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善終)했다. 모든 매스컴이 지면을 총동원하여 김추기경을 추모하는 온갖 기사를 싣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말씀이 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다. 평소에 “내 탓이로소이다”를 실천했던 분이기에 `사랑과 용서’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긴 하지만 이 말을 들으면서 며칠 전 술자리에서 외우(畏友) 최동전의 건배의 말이 떠올랐다.

술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가 갑자기 건배를 하겠다고 나섰다. 이날 모인 이들은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독재정권에 저항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던 민주청년협의회 동지들 몇몇이었다. 배춘실, 유영희, 이문승, 정연우, 이수용, 박영석, 안재창, 전대열 등이 그들이다. 배춘실의 딸 결혼을 핑계대고 오랜만에 한잔하기로 모인자리다. 최동전은 덮어놓고 따라하라고 하면서 `미용사!’라고 외쳤다. 어리둥절한 일행들이 아무도 복창을 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뜻을 포함한 약자냐 하는 투다. 그때서야 그는 먼저 해설을 한다.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며 사랑하자!”라는 뜻이란다. 그런 의미라면 아주 좋다고 모두 동의하고 힘차게 `미용사!’로 건배를 나눴다. 유신독재에 대항했던 젊은 투사들이 이제는 귀밑머리가 하얗게 변하여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자는 건배를 했는데 며칠 뒤 그와 똑같은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을 신문 톱으로 보면서 우리가 살아야할 교훈으로 일깨워졌다.

비록 술자리지만 철학이 있는 자리, 정의감이 살아있는 자리는 언제나 우리를 용솟음치게 하는 기운이 뻗어난다. 게다가 고담준론으로 스스로를 뒤돌아보게도 만든다. 단순히 술만 마시고 떠나더라도 한마디 건배의 말 속에 자신의 뜻을 풍기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금년은 십이간지(十二干支 )로 쳐서 소띠 해다.

소를 주제로 한 많은 사자성어가 있어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게 호시우행(虎視牛行)이다. 범처럼 날카롭게 보되 행동은 소처럼 느리게 해야만 한다는 뜻이리라. 이명박정부도 한걸음씩 점진주의를 표방한다. 그래서 나는 올해 건배의 말로 `뚜벅뚜벅!’을 선택했다. 웃음과 품위도 어울리지만 우선 힘이 있지 않은가. 뚜벅뚜벅 말없이 걸어가는 소걸음으로 우보천리(牛步千里)를 실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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