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김준연(金俊淵)은 관용과 통합의 정치인이다
<대구논단> 김준연(金俊淵)은 관용과 통합의 정치인이다
  • 승인 2009.02.2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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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열 (한국정치평론가협회장)

지난 1월29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낭산(朗山) 김준연선생 기념 사업회 창립총회는 이철승 헌정회장, 김형오 국회의장 등 정치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낭산의 유족을 비롯하여 유인학 기념사업회장, 김문석 가락종친회장, 유선호 국회의원, 박준영지사, 김일태군수, 유호진 군의회의장, 최상열 해공미술관 명예관장 등 후학들의 노력으로 세상을 뜬지 38년 만에 기념사업회가 창립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잊힌 인물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가 남긴 독립운동과 정치업적은 찬란한 것이었다. 그는 1895년 전남 영암군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마치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경기중학교를 다닌다. 일본에 건너가서는 동경대학교를 마치고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하며 조선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모스크바에서 취재활동을 한다. 이때는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여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로 변해있을 때였다.

젊은 낭산은 새로운 시대의 조류로 생각된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하여 이에 동조하게 된다. 이는 조국이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을 때여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자연스럽게 변화를 추구하는 자세를 갖게 된 것이다. 그는 귀국하여 항일단체인 신간회 조직에 깊숙하게 관여하며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제3차 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며 혹독한 고문을 받고 7년간 장기 투옥된다.

당시 일경은 새로운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르크스 레닌사상이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전염되어 군국주의 극우를 지향하는 일본군부의 제국 적 침략야욕에 찬물을 끼얹을 가능성을 크게 우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독립운동보다도 공산주의 운동자를 더 경계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낭산은 감옥살이를 마치고 동아일보 주필로 다시 언론계에 복귀했다.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는 히틀러의 광기어린 폭정이 계속될 때였다. 히틀러는 체제선전을 위하여 올림픽을 유치하였으며 역사상 최대의 제전을 벌인다. 마지막 날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는 마라톤 경기가 있었는데 이날의 우승자는 손기정선수였다. 손 선수는 서울 양정중학에 다니는 한국인이지만 그의 가슴에는 일장기로 더럽혀 있었다. 나라 잃은 국민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동아일보에서는 이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우승사진을 내보냈다. 손기정이 한국인임을 알리기 위해서는 당당하게 태극기를 그려 넣어야 했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못하고 일장기를 삭제하는 선에서 머무른 것은 소극적인 저항이었다. 군사독재 하에서 언론들이 행간에 기사를 암시하는 수법을 써서 민주화운동 기사를 알리는 노력을 계속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방법이었다.

이 사건은 일제경찰을 발칵 뒤집어 놨다. 동아일보는 혹독한 탄압을 받아야 했으며 주필이었던 낭산은 체포되었으나 사임함으로서 책임을 다했다. 경기도 전곡에서 해동농장을 관리하며 농사꾼 노릇을 했지만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등으로 연이어 투옥되어야 했다. 광복직전 일제 총독부는 자신들의 생명보전을 위해서 여운형, 김준연 등에게 정권이양 요청을 했지만 거절당한다.

광복 후에는 국민대회 준비위, 민주의원 등에 참여하는 한편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백관수 등과 함께 한민당을 창당하고 부당수로 활약하며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하여 유진오와 더불어 헌법제정에 적극 참여한다.

낭산은 6.25 민족상잔의 전쟁을 법무부장관이 되어 치른다. 참혹한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후 다시 국회에 진출하여 3,4,5,6,7대를 내리 당선한다. 민주당 최고위원으로서 UN한국대표가 되어 미국과 유럽, 아시아 지역을 돌며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영암 서호출신인 이환의가 문화방송 사장으로 있을 때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낭산을 만났더니 백제 왕인박사가 영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느냐고 묻기에 모른다고 했더니 일본에 데리고 가서 왕인박사 무덤을 안내해줬다. 그 인연으로 왕인박사의 사당을 세우고 국가적 관광지로 만들 수 있었으며 일본에 대해서 문화를 전달한 자부심을 갖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낭산 선생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건국공로훈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는 영예를 안았으나 자유민주당 당수나 민중당 총재로서 대통령에 출마하는 등 이상주의자로서의 행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로 활약한 사실을 감추지 않고 떳떳하게 밝히고 왜 공산주의를 반대하게 되었는지를 최일선에서 당당하게 외쳤다.

낭산은 첨예한 대립으로 치달은 광복 후의 정치권력 갈등을 극복하고 상호 관용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정치지도자였다. 오늘 날에도 그의 정치노선은 이상적이지만 지향하는 바가 옳고 바르기 때문에 후배 정치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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