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푸름을 죽여 더 큰 푸르름을
<대구논단> 푸름을 죽여 더 큰 푸르름을
  • 승인 2009.03.04 16:2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후섭 (아동문학가 · 교육학박사)

`푸른 것을 죽인다.’는 `살청(殺靑)’이라는 말이 매우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희승 국어사전’에는 `대나무를 불에 쬐어 대나무의 푸른빛을 없애는 일’, `사서(史書)’, `기록’ 또는 `서적’을 달리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대나무에서 푸른빛을 빼지 않으면 죽간(竹簡)의 재료로 사용할 수가 없다. 갓 베어낸 대나무 줄기는 아직 푸른 기운이 성하고, 그로 인해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없으며 썼다고 하더라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습기도 많이 남아있어서 오래 보관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대나무에서 살청을 하려면 뜨거운 불빛을 쬐어야 한다. 불에 쬐는 것은 모진 고문이나 다름없다. 사람에게 `인권(人權)’이 있다면 나무에게는 `목권(木權)’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목권을 함부로 희생시킨다. 그러나 나무는 기꺼이 그 뜨거움을 받아들인다. 구운 소금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유용한 소금으로 변하기 위해 뜨거운 불속의 고통을 감내한다. 이 또한 살청의 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무엇이 제대로 그 기능을 수행하려면 현재의 미흡함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아를 세워야 함을 알 수 있다. 대나무는 불에 태워지는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문서인 `사서(史書)’를 만들게 된다.

덜 익은 보리를 찧어서 죽을 만드는 데에도 살청 과정이 필요하다.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이고,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덜 익은 풋보리를 가지고도 죽을 쑤어야 한다. 덜 익은 보리가 어떻게 죽다운 죽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불에 쪼여 형식적으로라도 푸름을 죽이고 누렇게 익어가는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과정(過程)’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미숙한 푸름을 죽여야 비로소 쓸모 있는 그 무엇으로 변할 수 있고, 거기에는 거쳐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마치 사람이 혼례를 올리기 전에 먼저 `관례(冠禮)’와 `계례(?禮)’의 과정을 거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산불에 타죽은 노루를 주워 와서도 그냥 먹지 않고 지게작대기로 총질하는 것을 본 적 있다. `탕탕’ 소리만 내는 헛총질이었다. 지게작대기를 노루에게 겨눈 채 말로만 총을 쏘아도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결코 그 고기를 먹지 않았다.

헛총질이라도 했다면 노루는 총에 맞았고, 그러면 죽을 수밖에 없으며 이는 사냥에 의해 사람에게 먹을 것으로 운명 지어진 만큼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노루에게 한 헛총질 또한 살청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살청은 우리에게 모든 일은 순서를 밟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차(茶)를 만들기 위해서는 찻잎의 푸른 기운을 뽑아내어야만 한다. 다인(茶人)들은 이 일을 가리켜 `덖는다.’라고 한다. 이 또한 살청이다. 찻잎에서 살청을 해야만 오래 보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차로서 참다운 맛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연한 찻잎이 뜨겁게 달궈진 솥뚜껑에서 덖어질 때의 고통은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나 찻잎은 자신의 푸름을 죽이므로 해서 비로소 더욱 큰 푸름을 얻게 되고, 풋보리는 자신의 푸름을 죽이므로 해서 비로소 그 쓸모를 더욱 높이게 되며, 대나무는 자신의 푸름을 죽이므로 해서 만고의 보물로 승화된다.

사람도 물론 살청이 필요하다. 현재의 자신보다 더욱 유용한 사람으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뜨거운 고통이라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옛 어른들은 사람의 살청 방법으로 `개과불인(改過不吝)’을 강조하였다. 현재 자신의 허물을 고치는 데에 인색(吝嗇)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과오를 저질렀으면 즉시 고치라(過則勿憚改)’라는 가르침과 맞닿아 있다.

즉 자신의 허물을 빨리 고치지 않으면 그 자체가 더 큰 잘못이 되는 것(過而不改 是謂過矣)이기 때문이다. 아, 부끄러운 나의 허물이여. 가르침의 구절은 읽어도 지키기는 힘 드는구나.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