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향기> 역사의 베일에 감춰진 천년고찰 부인사
<종교의 향기> 역사의 베일에 감춰진 천년고찰 부인사
  • 김덕룡
  • 승인 2009.03.0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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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人寺, 대구 불교 중심지 위상 되찾는다
대구 동구 신무동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부인사(夫人寺)가 최근 세간에 주목을 받고 있다.

대구시가 오는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을 봉안했던 부인사를 ‘대구의 문화’를 알리는 주요 장소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대구시와 부인사는 우선 부인사지의 사적 지정을 위한 노력과 함께 장기적으로 부인사 종합정비계획안을 수립·착수해 ‘대구 불교의 중심지’란 점을 널리 홍보할 계획이다. 이에 맞춰 본지는 신라 천년 고찰 부인사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집중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註>

7세기 선덕여왕 창건설 유력...신라 대표 거찰 중 하나
민족 대표 문화유산 '고려 초조대장경' 봉안 기록 남아
대구시, 사적지 지정 추진위원회 구성.종합정비 계획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팔공산 부인사는 지난 7일 오후 사찰 경내 일화선원에서 ‘부인사지 사적 지정을 위한 공청회’를 가졌다.

이날 열린 공청회에서는 자료집 ‘부인사의 역사와 문화’ 내용을 중심으로 부인사 관련 문헌자료(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와 고고자료(최태선 중앙승가대 교수)에 대한 주제발표에 이어 전문가들의 토론이 진행됐다.

특히 토론 시간에는 주보돈(경북대 교수), 김성구(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 이강근(경주대 교수) 등의 전문가가 참여해 부인사지 사적 지정의 필요성과 타당성 여부를 적극 검토했다.

◈부인사 역사(창건)=부인사는 7세기 중반 신라 선덕여왕에 의해 창건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 사찰 경내는 선덕여왕의 진영을 봉안해 놓은 숭모전이 있으며 부인사는 매년 선덕여왕을 기리는 숭모제 행사를 봉행해 오고 있다.

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는“신라말에서 고려초 때 부인사는 불교 교학을 연찬하는 사찰로 유지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도선국사의 제자인 통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 868~947)가 이곳으로 출가해 교학을 공부했다는 비문 내용에 의해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부인사 주변 항공사진

부인사가 우리 역사에서 크게 부각된 것은 이곳에 고려 초조대장경을 봉안하면서부터다.

부인사는 신라 때부터 거찰(巨刹)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오랜 시기에 걸쳐 교학을 연찬하는 교종사찰의 사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지리적 여건상 외침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김 교수는 “비록 초조대장경이 이곳 부인사로 옮겨 봉안된 정확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왕실은 이러한 부인사의 제반 여건을 고려해 초조대장경의 이장(移藏)장을 결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부인사 문화(고고)=부인사의 규모와 전성기의 모습은 그동안의 학술적인 지표조사에서 발굴조사까지의 수집 자료를 토대로 추정되고 있다.

최태선 중앙승가대 교수는 “부인사의 중심공간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점차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부인사지의 사역범위를 현재의 순환도로 아래부터 현재 부인사의 북쪽에 걸친 곳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즉, 현재 부인사는 부인사지의 주요사역에서 벗어난 북쪽에 터를 갖춰 정비돼 있으며 창건 당시의 주요사역부터 남쪽으로는 큰 변화 없이 폐사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도로와 경작지 등으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부인사는 13세기 초반 대부분의 사찰영역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급격히 축소돼 현재에 이르렀다.

◈고려 초조대장경 자취는?=1011년(현종 2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초조대장경은 한자문화권에서 두 번째로 조성된 대장경이며 수록 내용의 방대함이나 탁월한 조판술 등에서 우리 민족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고려 초조대장경 목판은 1232년(고종 19년) 몽고군의 침입에 의해 불에 타버렸다.

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는 “현재는 경판 인출본에 의해 초조대장경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나 향후 부인사지 전역에 걸친 발굴조사가 진행될 경우 초조대장경 소실과 관련한 흔적은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향후 계획=부인사는 이번 공청회를 계기로 우선 국가사적지지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부인사종합정비계획안 수립에 착수할 예정이다.

부인사 종진 주지 스님은 “이번 공청회를 통해 부인사가 사적지로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만큼 앞으로 부인사 전역을 현재의 신앙공간으로서의 ‘부인사권역’과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부인사지권역’으로 구분해 종합적인 정비 작업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세부적으로 현재의 ‘부인사권역’은 선원의 발전과 함께 △선덕여왕 추모제 학술적 조명 △차문화 확산 △한국 토종의 참꽃나무 이식 사업 등을, ‘부인사지권역’은 전면적인 발굴조사와 함께 △고려초조대장경 관련 사업 △화엄학 계승 및 관련 사업 등을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김덕룡기자 zpel@idaegu.co.kr
지난 7일 오후 부인사 경내 일화선원에서 열린 ‘부인사지 사적 지정을 위한 공청회’에 참석한 종진 주지 스님(사진)은 “이곳 절에 온지 24년이 지났지만 오늘만큼 가슴벅찬 날은 아마 없었을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천년고찰 부인사는 신라와 고려시대 때 39개 부속 암자를 관장했으며 2천여명의 승려가 수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부인사는 사적지 하나 남아있지 않으며 옛 터의 보존 상태 마저 형편없는 수준인 탓에 그저 인근 포토밭에 묻혀 있는 평범한 절로 인식돼 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종진 스님은 “지난 1986년 은사스님인 성타스님이 오시기전까지 이곳 절에서 등기가 되어있는 땅은 하나도 없었다” 면서“이후 스님이 마을 사람들과 ’한 평 땅 사기 운동‘을 펼쳐 모은 돈으로 겨우 지금의 부지를 사들여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등기할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스님은 또 “현재 전체 사역(寺域) 가운데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된 곳은 5% 정도에 불과하다”면서 “그 보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부인사가 점점 잊혀져 가는 것이 더욱 안타까울 뿐”이라며 가슴을 쳤다.

이에 따라 종진 스님은 최근 사적 지정을 통해 부인사가 옛 거찰(巨刹)의 위상을 되찾도록 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종진 스님은 부인사의 복원 불사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과거의 영화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숨겨진 여래를 찾기를 바라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다.

종진 스님은 “사적 지정을 위한 이번 공청회는 부인사가 역사적 도량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첫걸음”이라며“조만간 사적 지정을 위한 본격적 절차를 밟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스님은 오는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관련해 “대구시가 세계육상대회를 기념해 2011년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우선 부인사에 모셔져 있던 초조대장경의 인쇄본을 일본 난센지 등에서 확보하려는 노력과 함께 장경각 복원에 대한 의지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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