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동안 책을 쓰다듬으면서 책이라는 물건 자체를 음미한다. 새 책이다. 주르륵 책갈피를 넘겨본다. 종이냄새와 잉크냄새가 묘하게 어울리면서 책은 이제 냄새로도 교감이 된다. 세련된 서체로 다듬어진 활자들이 깔끔하게 줄을 서 있다. 때로는 책을 읽을 때보다 책을 만지는 이 때가 더 즐겁다.
표지와 간지 디자인, 목차 구성과 저자에 대한 소개는 다시보고 또 보고 할 것이니, 제 1장 첫 쪽 첫 문장부터 읽기를 시작한다. 설렌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헉, 첫 문장이 주는 이 충격에 한참을 머무른다.
마음은 더 머물러 음미하고 싶은데 눈은 벌써 몇 줄 아래를 읽고 있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 때부터 한 구절, 한 구절을 씹고 되씹어 책을 천천히 먹고 싶은 욕구와 내 속에 없던 신선한 새 구절을 빨리 읽어나가고 싶은 욕구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생겨난다. 이 둘 사이에 타협은 없다. 문체에 익숙해지면서 읽기의 속도가 점점 더해진다.
이쯤에서 난 책을 잠시 덮는다. 저자의 ‘영혼의 지문’과 같은 이 구절들을 너무 쉽게 읽어나가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빨리 읽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잠시 읽기를 멈춘다.
책을 읽다보면 내 속에 어렴풋하게 있던 생각들을 저자는 얼마나 명쾌하게 표현해 놓았는지 저자가 나보다 더 나답게 느껴진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와 나 사이엔 긴장과 갈등과 격동이 지속된다. 책과 밥만 있으면 몇 달은 이 겨루기를 즐기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다 읽었다. 다 읽은 책을 만지고 있으면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뿌듯한 충족감에 휩싸인다. 며칠동안 이 책을 들고 다닐 것 같다. 식탁에서도 침대에서도 때로는 산책할 때도 들고 다닐 것 같다.
그런데, 책 읽기는 마냥 즐거운 것일까? 천만에. 아무 감동도 없이 그저 인내심만 키워주는 책들도 수두룩하다. 그런 책도 책이니까 읽을수록 좋을까? 난 그런 책 읽기보다는 ‘꽃보다 남자’ 재방송 보기를 훨씬 좋아한다.
이상현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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