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시론> 공부하는 자세
<팔공시론> 공부하는 자세
  • 승인 2009.03.23 16: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성열 (성형외과 원장, 의학박사)

우리 동네 사우나에 있는 이발소의 박사장은 60대 중반이다. 그런데도 몸매와 체격은 건장한 30대 청년이다. 키는 작지만 가슴과 양팔의 근육은 오랜 기간 수련한 듯한 모습이다.

일을 시작하기 전 그는 목욕탕 구석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다시 팔 굽혀펴기나 요가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스트레칭을 하는데 양다리가 거의 180도 일직선으로 벌어진다. 걸음은 허리를 꼿꼿하게 편 자세로 걷는다.

며칠 전 이발하면서 그가 늘 쓰고 있는 노트북에 대해 물어 보았다. 아침마다 컴퓨터를 보면서 뭘 그리 열심히 하냐고 했더니 전날의 수입 지출과 일기 비슷한 것이라고 계면쩍은 듯이 대답했다. 결혼 전부터 시작했으니 3.40년 정도 되었는데, 자기부인이 결혼 초 사과 궤짝에 종이를 발라 만든 박스를 이사 갈 때 마다 들고 다녀 불편해 하였는데, 이십 년 전부터는 컴퓨터로 바꾸었다고 한다.

필자는 87년경 미국에 갔을 때 컴퓨터의 필요성을 느끼고 처음으로 샀는데 그는 빨리도 사용하기 시작했던 셈이다. 화제를 돌려 동경의 한 이발사는 자기빌딩에 이발 학원을 차려 20명 정도를 숙식시키며 도제교육을 하고 있는데 6년간 근무하면 주인인 그가 직접 새로이 이발소를 열어준다며 상당히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거의 미장원에서 이발하고 정작 이발소에는 중년층 이상만 오는데 자식들도 뒤를 잇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니 사양업종의 비애라고나 할 까. 언젠가 저녁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는데 부동산 투자와 재테크에도 밝은 것 같았다.

시골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며 자수성가한 필자의 장인도 해방 전 중학교만 나왔지만 평생 일기를 썼고 생활이 규칙적이었으며 국궁을 열심히 하여 전국체전을 70대 초까지 참가하였고 또 책보기를 즐겨 하였다.

공부하는 여건만 좋았으면 대학교수에 맞을 타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규칙적인 생활에 자기 몸 관리를 부지런히 하면서 사려 깊은 생각과 대인관계로 자기사업에 충실하고 매일의 기록을 남기는 이 생활의 공부를 실천하는 점에서는 이 두 사람은 닮았다. 형제 중 가장 많이 장인을 닮은 아내는 장인이 돌아가신 후 유산으로 일기장를 가져 왔다.

가끔 그 일기를 읽으면서 제사로 시댁에 내려갈 때 중간에 있는 친정집을 혹시 들리려나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데 대해 회한의 눈물을 짓곤 하였다. 얼마 전 문상을 가서 만난 피부과 선배 한 분이 26세에 의사가 되어 면허 하나로 50년 이상 밥 먹고 살다 가면 그 인생도 충분히 만족할 만하지 않는가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물론 의사면허 취득 후 대개 전문의 과정을 거치니 전혀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큰 노력 없이도 그런대로 지낼 수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일본에서 필자가 공부할 때 주임교수는 같은 수술을 10번 하고 나서 그 다음에도 똑 같은 방법으로 수술을 한다면 그 의사는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항상 강조하였다.

이것은 일본 도요타 자동차 공장의 철학과 비슷한데 11번째 수술부터는 지금까지와는 조금이라도 다른, 자신의 생각이 들어간 개선된 방법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명치 유신시대에 계몽 사상가이며 게이오 대학을 세운 후쿠자와 유키치는 지식만을 알고 그것을 실행할 수 없다면 학문을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 시대의 남명 조식 선생(1501-72)은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루던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다.

그의 학문은 이치를 따지기 보다는 실행과 실천을 중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등 다수의 의병장이 그의 문하였던 것만 보아도 그 실천성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수학의 최고상인 필드상을 받은 히로나카는 그의 저서 `학문의 즐거움’에서 사는 것은 배우는 것이며 배움에는 기쁨이 있다.

사는 것은 무언가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며 창조에는 배우는 단계에서는 맛볼 수 없는 큰 기쁨이 있다. 단순한 지식의 주고받음은 학문이라고 말 할 수 없으며 평가할 가치도 없다. 여러 가지 지식은 생각하기 위한 자료이며 독서는 생각하기 위한 계기를 제공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후쿠자와는 ”논어를 읽고 논어를 모른다’고 했는데 이는 지식만 있고 그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창고에 지나지 않을 뿐 학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학문의 목적은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인간으로서의 할 일을 아는 것이다.

그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견문을 넓히는 것이 한 방법이다. 이 지식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자기의 생각을 깊게 하고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00년간의 시차를 두고 있지만 일본의 뛰어난 이 두 지식인은 마음을 겸손하게 가지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자기의 생각을 심도 있게 꾸준히 깊이 파고 들어가서 이치를 깨달아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학문의 자세라고 하고 있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