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아침>`피끝마을’의 한(恨)을 간직한 금성단
<달구벌 아침>`피끝마을’의 한(恨)을 간직한 금성단
  • 승인 2012.04.2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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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식 한국선비문화수련원 전임연구원 철학박사

지금으로부터 555년 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은 죽계(竹溪) 너럭바위에 앉아 가을햇살을 응시했다. 죽계를 타고 흐르는 단풍잎이 가을 햇살에 더욱 붉은 빛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고, 백성의 삶을 위하여 도를 세우고,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계승하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여노라” 금성대군은 평소 즐겨 암송하던 『근사록 近思錄』한 대목을 읊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세조형님의 쿠데타를 거부하기로 했네!” 순간, 순흥부사는 귀를 의심했다. 금성대군은 주저함이 없었다. “성공한 쿠데타가 아무리 미화된다 해도, 쿠데타는 패륜이 천륜을 짓밟고, 악이 선을 몰아내고, 거짓이 진실을 심판하는 무도의 극치일 뿐이야!”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권력에 눈이 멀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좌에 앉았던 세조가 아니었던가! 무차별적인 살인의 광기 앞에서는 법과 도덕이 무슨 소용이며, 인륜과 천륜이 무슨 상관이랴! 수양대군의 성공한 쿠데타를 거부한 모든 사람들은 비명에 횡사하지 않았던가? 북방을 호령했던 김종서를 비롯한 집현전 출신의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등도 모두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시작된 `죽계의 결의’는 금세 뜻있는 순흥(지금의 영주)선비들의 마음을 얻어 정의를 수호하는 의병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권력에 맨 주먹으로 저항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랴! 거사를 앞둔 2천여 아름다운 선비들은 세조의 창칼아래 쓰러져 갔다. 그렇게 순흥 30리 안에 거주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모조리 죽계에서 처형되었다.

죽계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피의 계곡이었다. 가을 햇살아래 붉게 타오르는 단풍잎보다 더 붉은 핏빛 물결은 영주 시내가 바라보이는 동촌 1리까지 20리를 흘렀다. `피끝마을’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선비정신이 태동하는 역사적 현장의 모습이다. 피끝마을을 지날라치면 역사를 흘러 오랜 선비들의 함성이 전해오는 듯하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그것이 설령 `살아있는 최고권력’일지언정 당당하게 거부했던 선비들의 함성과 기백은 전통유학을 지탱했던 사림정신으로 이어졌고, 관직에 나아가서는 어려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는 청백리(淸白吏)정신으로 구현되었고, 국난을 당해서는 백성과 국가를 수호하고자 하는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정신으로 계승되었다. 요컨대, 선비정신은 유학적 소양을 갖춘 실천적 지식인들의 자기완성에 대한 추구요, 더불어 살아가는 도덕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던 건강한 유학적 가치의 구현이었다.

그 후 200년 동안 순흥은 반역의 땅으로 지목되었기에 당시의 소상한 역사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역은 `정의롭지 못한 쿠데타 권력에 대한 정당한 반역’이었기에, 역사와 시대를 뛰어넘어 `선비정신’이라는 건강한 민족문화로 발전하여 유유히 계승되었다. 그러므로 금성대군, 순흥부사 그리고 2천여 선비들의 피의 대가로 탄생한 선비정신은 단순한 박물관의 역사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민족정신이다.

그러나 2천여 선비들의 넋이 서린 금성단 그 역사적 현장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초라한 표석하나와 지방 유림에서 올리는 조촐한 춘추향사만이 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행사의 전부이다. 더 이상 건강한 한국선비문화의 성지를 방치해서는 안 될 일이다. 600년 민족문화의 원천, 선비정신의 성지를 제대로 가꾸고 그 뜻을 계승하는 일은 이제 지자체를 넘어 경북의 정체성을 모색하고, 나아가 한국의 대표정신을 정립하는 시급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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