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나서다가 나는 다시 돌아오지요 돌아와선 왜 왔는지 잊어버려 다시 나가요 나가다가 생각하니 그게 시계였어요 시계를 찾기 위해 내가 뒤지는 곳은 시계가 없는 곳이죠 당신과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것처럼 시계를 찾다가 시간을 잃어버리는 일, 시간을 찾다가 손목을 잊어버리는 일, 새롭지도 않아요 오늘은 약국에 들러야 하는데 잃어버리는 걸 잊어버리는 약을 사야해요 하얀 알약을 보면 왜 죽음이 생각나는지 아세요 편도염을 낫게 하는 알약을 한꺼번에 털어 넣고 죽은 아랫방 언니가 있었거든요 한 알씩 시간 맞춰 먹어야하는 일을 잊었나봐요 나는 오늘 빨간 구름약을 살 거예요 깜빡깜빡 잊는 약, 시계는 아직 찾지 못하고 꼭 찾아야 할 이유도 없어요 시간은 이미 멎었어요 뭔가를 깜빡 잊는 일, 짜릿한 쾌감이에요 현관을 나서다 나를 잃어버리고 빨래통에 벗어놓은 나를 찾아 뒤집어쓰고 나 아닌 내가 다시 나가요 나가다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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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 등
해설) -해설 김인강-
자신도 모르게 깜빡깜빡하는 일들이 잦아지는 중년의 나이에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본 모습을 잃어버릴까 염려를 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모습도 저 모습도 결국은 내 모습이려니 그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보며 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아직도 너무나 건강한 모습이란 걸 반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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