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아침>성적표로는 알 수 없는 아이
<달구벌 아침>성적표로는 알 수 없는 아이
  • 승인 2012.11.08 14:3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현(대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큰 일 났다. 아무리 뛰어간다 해도 도저히 시험 시작 시간까지 교실에 들어갈 수가 없다. 교실에 들어간다 해도 시험 과목을 잘못 알고 지금까지 다른 과목을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제대로 시험을 칠 수가 없다. 필기구나 신분증은 물론이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뭐 하나 시험 칠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다. 어쩌면 이렇게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을까? 텅 빈 머릿속에 불안감만 꽉 차오르는데, 잠이 깼다. 꿈이었다.

아직도 시험에 시달리는 꿈을 가끔씩 꾼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한 지 이미 2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시험에 마음 졸이던 꿈을 꾼다. 살아오면서 시험을 참 많이도 쳤고 대개의 경우 시험을 잘 친 편이었는데도 꿈에서는 항상 시험 불안에 시달린다. 시험에 시달리는 꿈은 군대에 갔다 온 기록이 완전히 삭제되어서 다시 입대하라는 영장을 받는 꿈과 함께 평생에 가장 많이 꾼 꿈이다.

시험이 이렇게 스트레스를 주는 가장 큰 이유가 학생 때에는 아무래도 성적표 때문일 것이다.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여 중간고사를 치른 후에 처음으로 가져온 성적표를 보고는 갑자기 아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처럼 보였던 기억이 난다.

책도 부지런히 읽고 말을 참 재미있게 잘 해서 항상 밝고 명랑하게 친구들과도 무난하게 어울리고 틈만 나면 엄마 아빠와도 밤새 얘기하고 같이 놀 수 있어서 대견했던 아이가 성적표를 보고 난 이후에는, 공부는 하지 않고 재미있는 책만 보려하고 남에게 자세히 들어서 뭔가 배우려하지는 않고 옆에 있는 사람들과 잡담과 농담을 즐기며 놀기나 하는 산만한 아이로 보였다. `성적표는 성적표일 뿐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한껏 오해를 하며 아이의 생활 전반을 다그치고 몰아붙일 근거로 삼았다.

이번 주, 아들이 시험 기간이라며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다. 텔레비전에 개그 콘서트를 같이 보면서도 내 눈치를 슬슬 본다. 마음먹은 대로 시험공부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끙끙대고 있는 것이 훤히 보인다. 출근길에 보면 중고생들이 시험을 대비하여 자기가 만든 오답 노트나 요약 공책들을 손에 들고 외우면서 등교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교회나 성당, 사찰의 중고생 모임 인원이 시험 기간이 되면 줄어든다. 동네 엄마들 모임은 시험 기간 이후로 연기된다고 한다.

특히 이번 주는 우리나라 전체가 시험 기간에 들어갔다. 전 국민의 관심 속에 60만 명이 함께 시험을 치르는 수능시험이 치러졌다.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이 늦춰지고, 비행기 이착륙도 제한되며, 골목에서 행상을 하는 사람들의 스피커 소리까지 통제되는 낯설고 불편한 풍경이 이제는 익숙한 연례행사가 되었다. 시험이 교육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국민적 합의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협조는 별다른 이의 없이 쉽게 이루어진다.

시험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협조는 일단 교육에 상당한 힘이 된다. 아이들의 학습 능력이나 수준을 시험으로 확인하여 그 평가 결과에 따라 각자의 수준에 맞는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조정할 수 있고, 학습 영역과 학업 성취에 따라 각 개인에게 적합한 일을 사회에서 맡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험이 가진 속성과 실제 가치에 비해 시험 결과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신뢰 수준이 지나치게 높은 것은 문제가 된다. 시험은 평가할 가치가 있는 것을 평가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평가할 수 있는 것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학생의 언어능력은 삶 속에서 다양한 상황과 맥락 속에서 드러나지만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는 언어능력은 특정한 시간, 공간 조건 속에서 종이 시험지와 선택형 답지라는 일정한 형식과 제한된 구성 속에 표현할 수 있는 것들로만 제한된다.

결국 시험 성적표로는 아이를 온전히 알 수 없다. 성적표는 아이를 담기에는 작은 그릇이다. 그런데 시험에 대한 사회 전반의 과도한 신뢰는 자칫 성적표로 아이의 삶 전체를 파악하고 규정할 수 있는 듯 여기게 한다. 이런 생각이 사회에 만연하게 되면 개인적으로 이건 아니다 하면서도 부모는 모든 것을 제치고 일단 아이 성적표의 점수와 등수를 올려놓는 데 주력하게 된다.
갑자기 부엌에서 아내가 부른다. 그런 글 쓸 시간 있으면 애 시험공부나 좀 봐주라고.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