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26년’
[새영화] ‘26년’
  • 승인 2012.11.27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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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군대가 자국의 국민을 무참히 학살했다. 민주주의, 군부독재 반대를 외쳤다는 이유로, 또는 그저 그 주변에 살고 있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죽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형제였다.

한데 이 군대를 맨 위에서 지휘하며 발포를 명령하고 무조건 진압을 지시한 사람은 5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심판을 받지 않았다. 감옥에 들어갔는가 싶더니 금세 나왔고 재산 추징 요구에는 “통장 잔액이 29만 원”이라고 답했다.

영화 ‘26년’은 여기서 출발한다. 1980년 5월18일 계엄군이 점령한 광주의 참혹한 최후가 슬픈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간 광주 영령의 아들, 딸들은 ‘그 사람’이 국민의 혈세로 경찰의 철통 같은 경호 속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잘 먹고 잘살고 있는 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방안에서 창문을 통해 날아든 총탄에 어머니를 잃은 미진(한혜진 분)과 야산의 무수한 시체 더미 속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한 진배(진구), 금남로에 함께 서있다 계엄군의 총탄에 누나를 잃은 정혁(임슬옹)은 결코 평범한 아이들처럼 자랄 수 없었다.

술로 세월을 보내던 미진의 아버지는 급기야 ‘그 사람’의 저택에 접근해 방화를 시도하다 결국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숨을 거둔다. 진배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처참한 시신을 본 이후 정신줄을 반쯤 놓고 살다 병원에 입원한다.

어머니가 남긴 포장마차에서 하루 장사로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손에 쥔 어느날 TV에서 ‘그 사람’이 나와 전 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진배는 TV를 박살낸다.

경찰이 된 정혁은 ‘그 사람’이 사는 동네에서 교통업무를 맡아 그 사람의 차가 지나갈 때 신호등을 초록색으로 바꾸는 일을 하고는 죽은 누나를 생각하며 오열한다.

아버지가 죽고 국가대표 사격선수의 꿈을 접은 미진과 광주의 조직폭력배로 살게 된 진배, 자괴감에 빠져 있는 정혁 앞에 대기업 총수인 김갑세 회장(이경영)과 그 양아들이자 비서인 주환(배수빈)이 나타나 ‘그 사람’을 암살하자는 제안을 한다.

영화 ‘26년’은 5·18 광주 비극의 희생자들이 비극의 주범을 단죄하기 위해 작전을 꾸미는 얘기를 그렸지만, 역설적으로 현실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주변 건물이 모두 경호용으로 쓰이고 경찰 공권력과 사설 경호업체가 그 저택을 요새처럼 철통같이 보호한다. 그 사람의 끈이 닿아있는 기득권 구조 안에서 검찰과 경찰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이런 암흑 속에서 광주의 아들·딸들이 뚫리지 않는 방탄 창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던질 때 관객 역시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 이것이 단순히 극영화가 아니라 우리 역사의 비극이자 진행형인 현실이라는 데 생각이 닿으면 솟아오르는 울분은 더 커진다.

강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원작에서처럼 명확한 캐릭터와 갈등 구조를 그려 하나의 이야기로서 관객을 빨아들인다. 특히 1차 암살 시도를 그린 시퀀스는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만화 속 이야기를 생생한 극으로 살려내는 데는 젊은 배우들의 성실한 연기가 큰 힘을 발휘했다. 진구, 한혜진, 배수빈, 임슬옹 등 젊은 배우들은 5·18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진정성을 담은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극중 5·18의 죄의식을 지닌 채 살아온 김갑세는 말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사과를 스스로 하면 좋겠지만 안되면 강제로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는 얘기는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상식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당연한 상식을 말하는 데 26년이 걸렸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데에는 4년이 더 걸렸다.

심판의 날을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하는가. 영화는 묻는다.

29일 개봉. 상영시간 135분. 15세 이상 관람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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