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선·악 논란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한 인간의 악전고투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범접을 불허하는 영역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 중에 시간과 죽음이 있다.
유한한 삶이 허락된 인간에게 시간은 축복과 동시에 두려움이며, 인간의 겸손을 담보하는 마지막 보루다. 죽음 역시 신의 영역이라고 하지만 시간에 종속된 만큼 시간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절대적인 권위에 감히 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인간이 시간에 대해 나름의 제어장치를 찾았다면 그것은 그림일 것이다. 사진과 영상이 시간을 붙잡고 싶은 인간 욕구의 산물이라면, 그림은 기술 이전에 가능했던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이영철 작가 역시 시간에 의해 명멸하는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운 한 때를 한편의 시처럼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수성아트피아의 그의 초대전 주제 ‘그린 꽃은 시들지 않는다’ 에 시간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가 잘 반영돼 있다.
그는 “자연 속에 피는 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들지만, 그림으로 그려진 꽃은 시들지 않지요. 저의 그림에는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정신과 예술, 예술가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힘이 담겨 있습니다”고 했다.
“한동안 나는 예술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스스로 탑을 쌓고 올라가 삶과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란 어둡고 무거운 짐을 지고 지내느라 밝음과 가벼움을 아예 잃어버렸었지요” 라고 한 말에서 작가가 처음부터 시간과 존재에 대해 순응한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무겁게 침잠했던 그를 다시금 순수와 동심의 세계로 회귀하게 한 것 역시 시간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어둡고 무거운 세계에 갇혀 있지 않다.
그는 “지금의 나는 작은 존재와 따스한 세상을 봅니다. 세상 속에 넘치는 웃음, 가벼움 등 현실 속에서 조금만 눈길을 주면 선명하게 보이고,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동화(童話)들과 화해를 한 것 같아요”라면서 “가볍고 발랄한 상상력을 타고 판타지로 날아오르는 현실이든, 존재의 불안한 본질을 부둥켜안고 리얼리티로 걸어 내려가는 현실이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에서 사는 것은 여전히 아름다운 일이고, 그 사이에 파생되는 온갖 관계 맺기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지고 있지요”라며 주어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전했다.
작가가 시간과 존재와 화해했다고 여전히 시간과 관계맺고 있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마저 벗어 버린것은 아닌 듯 보인다. 그는 “내 그림 속 가벼움과 밝은 미소 끝에는 묵직한 존재에 대한 담론이 깊은 심연 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고 했다.
결국 그의 지향점은 인간의 본성적 행복의 조건들을 다시금 회복하는 데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도 정신줄을 놓으면서까지 확장하고자 하는 명예, 금전, 지위는 모두가 허상일 뿐, 진정한 행복의 가치는 사랑, 우정, 꿈, 느림, 여유, 웃음, 열정 등에 있다는 주장과 함께.
이번 전시에서는 시간에 의해 인간과 자연의 소중한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부터 출발한 달, 봄, 꽃, 연인, 사랑, 꽃밥, 희망, 행복 등 삶을 긍정하고 가치를 회복하는 몇 가지의 키워드로 압축된 대작들을 주로 선보인다.
또 인물 드로잉 3천여 점도 함께 공개된다. 전시는 12월 11일부터 22일까지 수성아트피아와 동원화랑. (053)668-1566
황인옥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