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 죽은 날
열정이 죽은 날
  • 승인 2012.12.18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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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안 시인

푸른색의 길 위에서

사십 대의 한 여인은 붉은 코트를 걸쳤다

오늘, 춥죠?

그녀가 정류장을 스쳐 가며 물었다

대답은 감감, 다리 사이로 기어오르는 푸른색을 바라보기만 한다

보라로 얼룩지는 시점이 어디쯤 될까

가만가만히 동공을 열었다, 위아래로

순간 붓질이 스쳤다

물구덩이가 그녀의 무릎을 때렸다

거 봐요, 춥잖아요

뚝뚝 떨어지는 붉은색이 길 위에 흘렀다

얼굴만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눈만 하얀 여자 얼굴은

배 위로 입술을 떨어뜨렸다

거 봐요, 춥잖아요

발부터 찬찬 보던 편의점 주인은

손 없이도 눈길을 거두었다

더듬지 않아도 수없이 더듬던 길에서

가끔 만지작대던 피카소를 만날 줄이야

하늘만 덮지 못한 그녀의 진한 냄새는, 추상보다 현실이다

흔적이 요란하게 남는 검게만 남는 발자국 위로

저벅저벅 보랏빛으로만 물들게 하는 붉은 여자

녹아 흐를 것만 같은 손으로 흔적을 남기는 여자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동그란 파도를 유리벽에 그렸다

비 오는 날, 쉼 없이 일그러지던 그림 안의 여자는

발자국을 채 지우지도 못한 채 택시를 세웠다

노란 택시를 미끄러지지 않게 잡고선

거 봐요, 춥잖아요

길이 푸르러서 혹은 발자국이 검으므로

춥잖아요, 그대는 붉지 않기 때문에 춥잖아요

붉기를 멈춘 지 얼마나 됐더라? 곰곰…

검은 발자국을 남긴 채 걷지 못하는 정류장을 남기고

붉은 여자는 그 자리를 떠났다

▷▶1979년 부산 출생. 낙동강문학에서 등단. 한국시민문학협회 정회원. 시인부락 동호회 회원, 통영시청 근무 중.

<해설> 비오는 날, 붉은 치마를 입은 40대의 여자가 나에게 춥냐고 계속 묻는 듯했다. 내 열정이 식어 빗물을 씻길 정도의 기분을 느낄 때였으니까. 그 여자는 나에게 열정이 식어서 춥다는 듯 푸른 거리에서 배회하다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아! 나의 붉음은 어디로 갔다가 다시 올까? 붉음은 따뜻함이요 파란색은 차가움이다. 그런데 붉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왜 자꾸 춥냐고 물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열정(붉음)이 식어가기(파랑) 때문이리라. 즉, 붉음이 사라지고 푸른 길만 아뜩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에 대한 고뇌를 엿볼 수가 있다. -제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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