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도시의 슬픔
눈 쌓인 도시의 슬픔
  • 승인 2013.01.1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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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계명대 경제금융학과 교수
오래전 미국에서 공부할 때 겪은 일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도시였다. 겨울이 되면 눈은 마치 폭포처럼 내리곤 했다. 놀라운 것은 아침에 깨어나면 거리는 믿지 못할 정도로 말짱했다. 밤새도록 누군가 눈을 치운 것이다. 공무원의 느려터진 일솜씨로 인해 일상생활에서의 불편함을 매순간 경험하던 나로서는 밤새 내린 눈이 흔적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축까지 미운 법. 말끔하게 치워진 거리를 바라보면서 “이 사람들 보게나. 평소에는 천하의 느림보더니만 눈 치우는 일에는 귀신이네. 세금이라고는 전부 이 따위 눈 치우는 일에만 탕진하는군!” 이라면서 빈정거리곤 했다.

최근 대구에 큰 눈이 두세 차례 내렸다. 폭포처럼 마구 퍼부어 내렸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거리가 온통 눈에 뒤덮였다. 때문에 도시는 당황한 눈치가 역력했다. 차는 미끄럼 치며 요동쳤고 사람들은 엉금엉금 기면서 갈 길을 멈추고 뒤돌아왔다. 그러나 거리에 쌓인 눈은 며칠을 두고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 사이 오가는 차바퀴에 짓눌려 스스로 녹아버린 도로 위의 눈과, 식당과 상점 앞에서 곧 빙판으로 변해 오가는 손님을 엉덩방아 찧게 만들게 되는 난처함을 모면하기 위해 가게 주인에 의해 가까스로 치워진 눈 더미를 제외하고는. 나는 눈 쌓인 아파트 주위의 골목길을 마치 곡예 하듯 지나다니면서, 이번에는 이렇게 뇌까린다. “젠장, 세금은 도대체 어디에 쓰고 그 많은 공무원은 다 어딜 갔나?”

경제학자인 나로서는 이런 식으로 내뱉는 말의 무모함을 잘 안다. 대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산업 단지를 조성하는 데 천문학적인 세금이 소요된다. 낙동강과 금호강의 강변에 자전거 길도 돈 안 들고 그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무원은 또한 얼마나 바쁜가. 하루가 멀다 하고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서울 중앙 부처의 공무원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지역의 중소기업 사장을 만나서 현장의 애로를 청취하고 민원을 해소하느라 하루하루가 전쟁인데 거리에 쌓인 눈에 정신을 팔 염두를 도저히 낼 수가 없다. 이러한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경제학자가 고작 하는 말이 눈 쌓인 도시의 슬픔 따위라니! 평소 자주 만나는 대구시 공무원은 이 글을 읽고 나중에 만나면 “날씨가 풀리고 또한 계절이 바뀌면 이런 눈 따위로 생긴 문제는 금방 해결될 터인데 웬 터무니없는 잔소리람?” 라며 힐난조로 따질 지도 모른다.

도시가 당면한 문제에 입각하여 우선순위가 정해지고 이에 따라 세금이 투입되고, 또한 공무원도 이에 따라 자신의 업무시간이 할애되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람이 일상적으로 다니는 거리에 쌓인 눈을 치우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어 그곳에 세금을 사용하고 공무원이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그가 나에게 설득하려고 든다면, 나는 일단 수긍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이 일상적으로 다니는 골목길에 쌓인 눈을 치우는 일과 강변에 자전거 길을 조성하는 일 가운데 무엇이 더욱 중요한지와 관련해서는 그와 정색을 하며 토론을 하고 싶다. 혹시라도, 골목길의 빙판길을 걸어 다녀야 하는 사람은 승용차를 몰고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적 관심의 사각지대로 취급되고 지방정부의 재원 투입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경제학자인 내가 눈 쌓인 도시의 슬픔을 끄집어내는 것은 세금의 문제와 공무원의 태도를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공동체의 자율성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눈 쌓인 도시의 골목길은 주인 없는 땅은 쓰레기장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공유지 비극의 여실한 현장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학은 다양한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롬은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자율적 방식을 주목하고 있다. 오스트롬에 따르면 골목길에 쌓인 눈을 치우기 위해 반드시 세금을 투입해야 할 이유는 없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함께 눈을 쓸어내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눈 내리는 다음 날 아침 도시에서 가장 시급한 최우선 과제는 눈 치우기라는 사실을 모두가 공감하는 것. 그런 다음에는 굳이 세금을 들이지 않고도 가능한 적절한 형태의 리더십이 도시 내부에서 발휘될 수가 있다. 이에 따른 제안 하나. 눈 내린 다음 날 아침 대구 시장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앞에서 스스로 눈을 치우는 솔선수범을 보인다. 대구의 모든 구청장과 기관장도 이를 따른다. 언론에서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그 다음 날 도시의 모든 아파트와 골목길 어귀에서 동네 공동체의 자율적인 방식에 따라 스스로 모인 사람들이 합심하여 눈을 함께 치운다.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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