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미술관장? 해외경력 10년이상
여자가 미술관장? 해외경력 10년이상
  • 황인옥
  • 승인 2013.02.04 17: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人> 김선희 대구미술관장

대구 미술·작가 세계무대 세울 것
/news/photo/first/201302/img_89234_1.jpg"대구미술관김선희관장/news/photo/first/201302/img_89234_1.jpg"
대구미술관 김선희 관장은 “‘글로벌 프로젝트’를 꾸준하게 실천하고, 이와 동시에 시민들이 대구미술관을 많이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학생 단체 관람 위주에서 벗어나 적어도 250만 대구 인구 중에 하루 2천500명은 와야 미술관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보고 이 목표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생면부지의 대구에 그녀가 왔다. 그녀가 생경(生硬)하기는 대구도 매한가지. 지난해 4월 대구미술관 사령탑으로 부임한 김선희 관장 이야기다.

경기도 여주 출생, 전라도 광주에서 성장, 일본과 중국의 유명 미술관에서 일한 국제적 경험, 그리고 여성. 그녀를 둘러싼 이 모든 이력들이 파격으로 다가왔다.

인선 발표 후, 대구미술계의 수장 자리를 꽤 찬 신임 관장에게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다. 조금 과장하면 대구 미술계가 술렁였다. 워낙 예상치 못한 인선이었을까. 술렁인 만큼 호된 신고식도 치렀다. 대구 입성 초기에 쏟아졌던 지나친 관심을 뒤로하고 대구와 대구미술 적응기에 들어간 그녀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낯선 만남, 호기심 어린 동거가 시작 된지 10여 개월이 흐른 지난 1일, 이제 누가 봐도 대구 사람 다 된 김선희 관장을 만날 수 있었다. ‘대구의 무엇’이, 아니 ‘그녀의 무엇’이 단기간에 저처럼 대구에 푹 빠지게 했을까. 지난 10개월 동안 그녀에게 대구는 어떤 곳이었을까.

10개월 만에 다시 만난 그녀는 달랐다. 부임 후 첫 인터뷰 때 보였던 경직된 모습은 없었다. 자신감과 에너지는 넘쳤고, 목소리와 미소는 부드러웠다. ‘대구미술관을 세계 미술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등등한 기세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의 그녀가 있었다. 

◇신생 미술관의 매력과 개척자 식 방랑벽이 대구로 오게 해

- 연고도 일면식도 없는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이런저런 관심을 받았는데, 당시 인사권자였던 대구시의 임명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글로벌(GLOBAL)한 조건을 크게 보았다고 들었습니다. 영어와 일어, 중국어가 원어로 강의할 만큼 수준이 되고, 일본의 선진 미술관과 중국의 미술관에서 10년 이상 일한 글로벌한 현장 경험들을 아마도 심사위원들이 중시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취임 당시 각오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

“일본 동경의 모리미술관에서 5년, 중국 상하이 젠다이 그룹 히말라야센터(종합예술센터) 예술 감독, 샹하이 번드 18(Bund18), 크리에이티브 센터(Creative Center) 관장, 중국현대미술상 CCAA 관장 등으로 일하고 귀국 한 첫 소임지가 대구미술관이었습니다. 대구미술관이 개관 1년 밖에 안 된 신생미술관이라는 점이 저에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제가 축적해 왔던 지식과 외국의 선진 현장에서 체득했던 산 경험들을 활용해 미술관을 훌륭하게 키워나가는데 기여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국내의 공립미술관은 미술관 자체의 역사가 짧다보니 국제적인 수준에는 크게 못 미치는 경향이 있어서 한국에서 새롭고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었지요.”

- 최종 발표 전까지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저에 대한 반대가 심하다는 이야기를 누차 들었기 때문에 아예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가, 막상 최종 발표가 났을 때는 사실 믿기 어려웠고 만감이 교차했었지요. 무엇보다 저를 뽑아주신 대구시와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는 김범일 대구 시장님께 감사한 마음이 컸었고, 저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해 정말 열심히 일해서 감사의 마음을 대구시에 되돌려 드리겠다는 생각을 굳게 했었지요. 지금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입니다.”

- 보수적인 대구에서 굉장히 빠른 시간에 적응을 잘 한 것 같다.

“가끔 재미로 점을 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점궤가 있습니다. 바로 ‘역마살’입니다. 한 곳에 머물기보다 새로운 공간과 분야에 도전하며 살아오게 한 타고난 역마살이 큰 도움이 됐었던 것 같습니다.”

- 그동안 인생에서 펼쳐진 역마살은 어땠나요.

“우리나라 나이로 고등학교 1학년 때 혼자 몸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는 아들을 앉혀놓고 엄마로서 한 말이 ‘우리는 던져진 인생이고, 너의 인생은 네가 개척하는 것이다’는 것이었지요. 이 말은 제가 평생 간직하고 있던 소신이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졸업 후에는 전남 순천 등지에서 교직생활을 했습니다. 점점 교직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홀연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다시 국내로 돌아와 몇 년을 정신없이 바쁘게 일했지요. 그러다 또 역마살이 도져 일본과 중국으로 도전을 떠나 큐레이터로 일을 했습니다. 역마살로 대변되는 저의 이런 삶의 궤적이 자연스럽게 아들에게 전해진 것일까요. 지금 제 아들도 미국의 대학에서 영화미술 필름 쪽으로 전공을 하고 있고,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습니다.”

◇ 대구의 매력, 특별한 사람들과의 만남

-지난 10개월 동안 많은 분들이 애정 어린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다. 특히 생각나는 분이 있다면.

“대구시장님과 문화관련 부서 공무원들의 도움이 무엇보다 컸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저를 매번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격려해 주셨어요. 그리고 또 한분, 지역의 원로이신 문태갑 전 서울신문사 사장님이 계십니다. 이분과 저는 행사에서 한두 번 뵈었을 뿐인데 어느 날 저를 위해 지역 원로들을 초청하는 자리를 만드시고 그 분들에게 저를 소개하시고 대승적 차원에서 도와주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고 갔다가 ‘이것이 대구의 저력이구나’ 싶어 상당히 놀라고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새삼 납니다. 이분들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제가 가진 모든 역량을 대구미술관에 풀어 놓을 각오입니다.”

- 대구 미술은 어떻습니까.

/news/photo/first/201302/img_89234_1.jpg"/news/photo/first/201302/img_89234_1.jpg"
“대구 와서 보니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들과 가로수와 잘 구획된 도로 등 자연적인 조건과 인위적인 노력들이 조화를 잘 이뤄 도시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대구의 근,현대미술의 역사가 대단함도 알게 되었지요.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온 대구의 근대 미술이 우리나라 미술사에 차지하는 비중과 1970년대 현대미술에서의 역할이 높았지요. 하지만 대구에 미술관이 너무 늦게 시작됐고, 그런 영향 때문에 대구미술이 힘든 길을 걸어왔던 것 같습니다.”

지역에 터전을 잡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작가가 드물다는 진단과 개인의 투혼은 있었지만 개인을 벗어난 좀 더 크고 조직적인 지원, 예컨대 전문 미술관의 역할이 이뤄지지 않아 근대와 1970~80년대 대구미술의 명성이 사라지고 새로운 작가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설명도 덧붙이며 해결책도 제시했다.

“21세기는 지구촌 시대입니다. 국내와 국제 활동이 함께 가야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현대의 미술사 추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꼭 중앙을 거쳐서 국제무대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역량만 있다면 바로 국제무대에서 유명해 질 수 있는 지방에게 기회인 환경이 우리 앞에 열려 있어 그렇습니다.”

◇세계와의 소통으로 ‘대구 미술’을 키워야

-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든 국제무대에 맞서고 대응해야 합니다.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통로와 발판이 되어주고, 소스를 제공하고, 방법을 여는 역할이 바로 대구미술관이 해야 할 역할이겠지요. 대구미술관이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 프로젝트’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대구 작가들을 상대로 대구 미술을 세계로 나가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 방법론은 무엇인지.

“세계 유명 미술인들이 대구로 와야 합니다. 우리는 세계적인 유명 미술인들을 대구로 불러오고 그들을 지역의 미술인들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광주 비엔날레에 참석한 세계적인 미술관의 관장이나 큐레이터들 대구미술관으로 불러오고 그들에게 지역 작가들의 스튜디오를 보여주며 대구의 작가들에게 네트웍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호감을 보이는 해외 유명 관장이나 큐레이터들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 국제무대와 대구가 바로 소통하면 조금씩 성과가 나타날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인재인 관장님의 글로벌 네트웍도 한 몫 하는 건가요.

“국제적인 경험에서 축적된 통찰력과 실질적인 해외 네트웍, 실전 경험이 관장의 조건이라면 저는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봅니다. 저의 이 조건들을 십분 발휘해 히딩크 감독이 국제 사회에 한국 축구를 알렸듯이 대구미술관과 지역 작가들을 세계무대에 알리는데 역할을 할 것입니다.”

- 일본에서 근무하셨던 모리미술관은 어떤 곳인가요.

“개관 1년 반전에 갔는데 정말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개관 8년 전부터 직원을 뽑아 완벽하게 준비하는 시스템이 제게는 문화적 충격이었지요. 특히 미국 모마미술관과 자매결연을 맺어 개관 2년 전부터 베니스비엔날레 등 뜨거운 열기가 있는 세계 곳곳을 찾아 모리미술관을 홍보하는 것도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개관 전에 이미 모리미술관은 유명해져 있었고, 지금은 경비나 관리요원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종사하는 직원이 약 600명이고, 학예실만 60여명, 1천500엔 (우리나라 돈으로 약 2만원)의 관람료를 지불하는 관람객이 하루 평균 7천명인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성장했습니다.”

◇한국 특유의 미학이 세계 일류를 만든다

- 중국 상하이 젠다이 그룹 히말라야센터에는 어떻게 가게 됐는지.

“모리 미술관에서 일하면서 ‘아시아 시대, 아시아 미술이 대세다’는 주장을 자주 했는데, 평소 아시아 현대 미술관에 집중하겠다는 나의 소신과 젠다이 그룹 회장님의 생각이 맞아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 분이 모리미술관을 3번이나 찾아와 함께 일하자고 요청했고, 나 역시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 가게 됐습니다.”

- 중국 미술이 세계 미술시장에서 태풍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중국은 서양인들 도구 써서 흉내내기보다 중국인 특유의 대륙적 기질, 극단적인 색깔, 형태나 정서, 생각을 담는다. 서양의 도구에 극단적인 중국 특유의 미학이 먹혀드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대비는 서양인들과 맞고, 그래서 중국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 일본과 중국과 비교해 우리나라 미술은 어떻습니까.
/news/photo/first/201302/img_89234_1.jpg"/news/photo/first/201302/img_89234_1.jpg"
카와마타 작가의 전시회에서 작가와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한국현대미술은 현재 세계화 하고 있지만 세계시장에서는 아직도 저평가 되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섬나라 일본과 대륙 중국 사이에서 풍부한 감성과 다양성 가지고 있고, 잠재력 있습니다. 국력이 낮아 저평가 되는 점도 있기 때문에, 이것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미술관 관장들과 미술인들의 과제로 봅니다.”

- 향후 미술관 운영 계획을 밝힌다면.

“‘국제화에 부응하고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미술관’이 저희들의 비전입니다. 국제화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꾸준하게 실천할 것이고, 이와 동시에 대구시민들이 대구 미술관을 많이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학생 단체 관람 위주에서 벗어나 적어도 250만 대구 인구 중에 하루 2천500명은 와야 미술관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보고 이 목표에 집중할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늘고 있고, 지난 주말의 경우 궂은 날씨에도 1천여명이 왔다 갔습니다. 앞으로 노력하면 충분히 달성할 것으로 자신하고 있습니다.”

사람 속에 있을 때, 자신을 던지고 차이를 나눌 때, 발 끝을 스치는 이름없는 들꽃과 마주할 때 그녀는 행복을 느낀다. 여전히 행복에 목마르고, 여전히 꿈꾸는 그녀. 대구 미술관을 세계 미술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야무진 꿈, 그녀의 꿈은 대구 시민들의 꿈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는 이미 대구 사람이었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 약력
전남대학교 사범대학(미술교육과) 졸업
전남대학교 대학원(미술학과) 미술학 석사
광주 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일본 모리미술관 선임 큐레이터
중국 상하이 젠다이 그룹 히말라야센터(종합예술센터) 예술감독
중국 상하이 번드 18, 크리에이티브 센터 디렉터
중국현대미술상 CCAA, 디렉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학부 강사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