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붙잡는 말
마음을 붙잡는 말
  • 승인 2013.02.14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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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현
대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한의사인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노인들이 병원을 찾아와 병과 관련 없는 온갖 신세타령을 해도 노인의 손을 잡고 그윽하게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듣는다. 그러고는 정이 가득한 표정에 잔잔한 목소리로 편안하게 노인의 병에 대해 얘기해준다. 그 얘기만 들어도 병이 나을 것처럼 말을 쉽고 편하게 잘 한다. 그런 그가 공식 석상에서 연설을 할 때 보면 앞뒤 말이 어긋나고, 했던 말을 또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청중에 압도당해버린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상당히 유명한 토론 진행자가 있다. 그가 진행하는 토론대회에 참가 했더니 날카로운 질문과 명쾌한 강의로 참가자들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말로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둘이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눠보니 말이 통하지 않고 답답하기만 했다. 그는 나를 평가하는 듯한 질문을 자주 했고 강의하듯이 말을 했다. 듣기가 언짢았고 밥맛도 없어졌다.

분명히 조금 전에 말로써 나를 사로잡았던 분인데 지금은 말 때문에 이 사람과 더 오래 마주 앉아 있기가 부담스럽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이처럼 상황에 따라 다르다.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도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자주 만나는 회사원이나 공무원 중에 직급이 높은 사람들을 대할 때 이들이 말로써 부하들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보면 감탄할 만하다. 직원들 분위기에 맞추어 우스갯소리도 잘하면서 업무 지시도 명확하다. 식당이나 술집에서 주문을 할 때도 음식점 종업원들이 기분 좋게 서비스할 수 있도록 절묘하게 부탁한다. 그런데 이들도 공식적인 회의나 사업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에는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말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힘들다고 한다.

말을 적절하게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농담을 시골 교장선생님 훈화처럼 끝도 없는 독백조로 하거나, 훈화를 자질구레 시시콜콜 잔소리처럼 해서는 곤란하다. 건배 제의를 엄숙하게 연설하듯 해서 흥은 내려앉게 하고 팔만 아프게 하거나, 연설을 건배 제의하듯이 흥미 위주로 놀이처럼 해서는 모임이나 행사의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가족들을 모아놓고 부모가 자녀에게 강의하듯 말하거나 공식적인 자리를 사적인 수다로 채워도 난감해진다. 어머니가 선생님처럼 격식 있게 말하거나 반대로 선생님이 어머니처럼 친근하게 말해도 부담이 된다.

명분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실리를 따지고 들면 사람이 약아 보이거나 비루하게 느껴지고, 실리를 따지는 자리에서 명분을 거론하면 무능하게 비치거나 허영이 가득한 사람으로 보인다. 개인의 의견을 묻는데 공문서에 있는 대로 말하는 사람은 주위를 답답하게 하고 공식적인 판단을 묻는데 사견을 얘기하는 사람은 주위로부터 오해를 받게 된다.

대체로 말 잘한다는 것을 우선은 세상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해 내는 수준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 단계도 매우 중요하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언어와 같이 선명하게 분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날짜라는 언어로 나누어 표현할 때 비로소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정확하고 분명한 언어는 사물과 현상을 의식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존재하게 한다.

말하기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이 오고가는 상황과 맥락을 간파하고 말하는 것이다. 소통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말하기의 달인으로 인정받는 많은 정치인이나 행정가들도 한결 같이 국민과의 소통, 조직 내의 소통을 위해 애를 쓴다. 말하기가 듣기를 전제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말하기의 궁극적인 목적이 결국 소통에 있음은 확실하다.

말하기에서 중요한 것이 내게는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수시로 변하는 생각과 마음을 말로써 붙잡아 두는 것이다. 순간순간 달라지고 휘청대는 내 의지와 욕구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말로써 포착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내 삶을 덜 흔들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흔들려야 인생이라지만 인생이기에 덜 흔들리고 싶다.

오늘도 수다와 잡담, 회의와 토론, 강의와 수업으로 하루 종일 말했다. 듣는 사람의 마음도 물론이지만 내 마음이 변하지 않게 붙잡아 두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말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이미 저기에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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