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구나 신분증은 물론이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뭐 하나 시험 칠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다. 어쩌면 이렇게도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버렸을까? 텅 빈 머리 속에 불안감만 꽉 차오르는데, 잠이 깼다. 꿈이었다.
아직도 시험에 시달리는 꿈을 꾼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한 지 이미 2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시험에 마음 졸이던 꿈을 꾼다. 살아오면서 시험을 참 많이도 쳤고 대개의 경우 시험을 잘 친 편이었는데도 꿈에서는 항상 시험 불안에 극도로 시달린다.
시험 불안 꿈은 군대에 갔다 온 기록이 완전히 삭제되었기 때문에 다시 입대하라는 영장을 받는 꿈과 함께 평생에 가장 많이 꾼 꿈이다.
교육청에서 일을 하다가 25년 전의 학교 시험 문제지를 보게 되었다. 문제가 얼마나 단순하던지 요즘 아이들이라면 내용을 몰라도 답지의 형태 차이만 가지고도 답을 찾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런 문제를 잘 풀어보겠다고 내가 청소년기에 그렇게도 애를 썼구나 생각하니 뭔가 아쉽고 허망한 느낌이 든다.
아들이 시험 기간이라며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다. 텔레비전에 개그 콘서트를 같이 보면서도 내 눈치를 슬슬 본다. 마음먹은 대로 시험공부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끙끙대고 있는 것이 훤히 보인다.
출근길에 보면 중고생들이 시험을 대비하여 자기가 만든 오답 노트나 요약 공책들을 손에 들고 외우면서 등교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교회나 성당, 사찰의 중고생 모임 인원이 시험 기간이 되면 줄어든다고 한다. 동네 엄마들 모임은 시험 기간 이후로 모두 연기된다고 한다.
아이들의 학습 능력이나 수준을 시험으로 확인해 보는 일은 마땅히 필요하다. 하지만 시험이 가진 속성과 한계에 비해 시험 결과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와 신뢰 수준이 적절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 높다.
시험은 아이가 갖고 있는 여러 능력 중 극히 일부만을, 그것도 특정 시간과 상황 속에서 보여줄 수 있을 뿐인데 우리는 그것으로 아이 자체를 어떤 수준으로 쉽게 규정지어버린다. 이런 생각이 우리 사회에 편만해있으니 이건 아니다 하면서도 일단 아이의 점수와 등수를 올려놓고서 다음 고민을 하기로 한다.
갑자기 부엌에서 아내가 부른다. 그런 글 쓸 시간 있으면 애 공부 좀 봐주라고.
이상현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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