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정 아빠’는 오늘도 열공중
‘사오정 아빠’는 오늘도 열공중
  • 강성규
  • 승인 2013.02.2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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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중년가장들> 1. 갈 곳 없어 도서관 신세

준비 없이 조기퇴직 다시 취업전선 내몰려

공무원·자격증 등 도전...새로운 꿈 향해 책과 씨름

대졸 자녀와 함께 동반 구직 비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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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대구 중구 중앙도서관 열람실 앞에 비치된 신문 코너에서 40대 남성이 신문을 읽고 있다. 김지홍기자
한때 유행하던 ‘사오정’이라는 단어가 있다. ‘45세가 정년’이라는 말을 줄인 표현으로, 정년으로 알려진 65세까지 직장에 머무르지 못하고 조기 퇴출될 수 있는 40대 직장인들의 처지를 말한다.

경기 불황의 후폭풍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40대 중후반 남성들이 증가하고 있다. IMF 등 경제대란을 겪으며 위기에 빠진 ‘베이비 붐’ 세대(1955~1963년 생)에 이어 바로 뒷 세대인 이들에게까지 경기침체의 여파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창 일할 나이에 직장을 나온 이들 일부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며 전문직 자격증이나 고시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취업을 위한 준비에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20대와 달리 40대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처지다.

퇴직금 등 종잣돈이 있는 이들에게는 식당 등 서비스 업종으로 진출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너나할 것 없이 몰리다 보니 이마저도 경쟁심화로 인해 동반 침체 및 몰락하는 상황이 빚어지며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일자리 부족현상은 세대 간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 세대와 분야에 걸친 심각한 문제이며, 특히 별다른 주목조차 받지 못하는 40대 중년층들을 위한 지원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40대 중후반 ‘가장들의 위기’의 실태와 원인, 해결책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편집자주>

20일 오전 8시 30분. 대구 중구 중앙도서관. 도서관 출입문은 이어지는 발걸음으로 잠시라도 닫혀 있을 틈이 없었다.

이날 도서관을 찾는 젊은 층 사이에서 서류 가방과 정장을 한 40대 중·후반의 남성들이 예상 밖으로 많았다.

이들은 열람실에 들어서자마자 지정된 좌석이 있는 것처럼 자리를 찾아갔다.

그들의 자리에는 헌법, 민법, 부동산학 개론, 회계학, 토익 등 여느 대학 고시·취업준비생들과 다르지 않다. 열람실 모퉁이에는 칫솔, 물컵, 담요 등 한살림을 차려놓은 자리도 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 2시간쯤은 기본, 아예 자리에 일어서서 허리를 주무르며 공부하는 사람도 많았다.

중소기업에 다니다 퇴직한 P(45)씨 자리에는 도서관에서 빌린 경제학, 인문학 관련 책이 쌓여있다.

“갈 곳이 없어 시간 떼우러 도서관에 왔다. 여기 오신 분들은 자격증 시험 준비 많이 하는 것 같아 나도 고민 중”이라고 말하는 P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최근 공인중개사, 주택관리사 등 유망 직업으로 손꼽히면서 취업 외에도 창업, 재테크 목적으로 ‘전문자격증’을 공부하는 40대가 늘고 있다.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 중인 L(47)씨는 매일 아침 9시까지 도서관에 와서 오는 10월 말에 있을 시험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L씨는 점심과 저녁은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김밥 두 줄로 떼우는게 일상이다. “식당까지 가서 먹기 좀 그렇다. 시험 때까지 시간적 여유는 있는 편이지만 합격률이 얼마되지 않아 조금 긴장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공인중개사 시험의 최종 합격률은 지난 2007년부터 2010년까지 평균 19.48%, 지난해는 21.93%이다.

그는 “주변에 경기 불황으로 새로운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미래, 가족을 생각해서도 빨리 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오전 10시. 열람실 복도 신문 코너에 비치된 신문들은 며칠 지난 것처럼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M(46)씨는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되니까…”라며 신문에 있는 경제면을 유심히 쳐다봤다.

M씨는 퇴직 후에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모아둔 돈으로 사업을 하려고 구상 중이다. 그는 “처음에는 눈 앞이 깜깜했다. 사업 틀이 조금 잡혔지만 여전히 준비 중”이라며 “집에는 눈치 보이고, 밖에는 갈 데 없어서 도서관에 왔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대학에 졸업한 자녀가 있는데 아직 취직을 못해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오늘 아침에도 딸아이에게 ‘나도 너도 취직 때문에 고생이네’라고 농담을 주고 받았지만, 아빠로써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아직은 직장에 다니고있지만 불안한 앞날을 준비하는 40대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건설업에 종사한 지 10년차인 K(40)씨는 2~3년 전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수시로 도서관을 찾는다. 그는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건설업계도 타격을 많이 받아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안정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투자 아닌 투자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요즘 공무원 시험에 올인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일 하면서 준비는 하고 있지만…”이라며 말을 흐렸다.

오후 2시. 오전에 비해 훨씬 빼곡해진 열람실. 책상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희끗희끗한 머리는 들릴 줄 모르고 내일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김지홍기자 kjh@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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