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섭리, 생(生)의 흔적
자연의 섭리, 생(生)의 흔적
  • 대구신문
  • 승인 2009.05.05 02:2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한 가뭄 몸살을 앓던 대지에 반가운 단비가 촉촉이 내렸다.

그간 새벽 산사의 범종(梵鐘)소리에 맞춰 어김없이 오르는 산행을 한동안 하지 못했었다. 몇 달째 물 한 방울 제대로 받아먹지 못한 바짝 마른 대지가 성이 났는지 산 속을 파고드는 오솔길까지 흙먼지로 뒤덮였었다.

평소 기관지가 별로 좋지 않은 나는 `먼지가 싫다’라고 투덜대는 목구멍의 하소연에 못 이겨 산행을 잠시 접어두었다. TV뉴스에는 이곳저곳에서 산불이 났다는 소식이 연일 그치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 본 청도 운문 댐 맨 위쪽은 맨살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댐 수위도 무척이나 낮아져서 쭈글쭈글한 댐 벽면이 켜켜이 그려놓은 나무의 나이테를 닮았었다. 평생 흙내만을 맡으시며, 애옥살이 하시다가 영면하신 아버님의 주름살 얼굴이 떠올랐었다.

비가 개인 오늘은 모처럼만에 산행을 했다. 솔 향내 풍기는 숲속을 따라 자박자박 걸어본다. “어쩌구―저쩌구―”하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합창소리에 소나무도, 이름 모를 들풀도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오늘따라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 검정색 선글라스에 이상한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스쳐간다. 아마도 봄 햇살에 얼굴 그을리는 것을 막으려고 가리개를 쓴 모양이지만 얼굴 좀 타면 어떠랴? 하긴 `봄 들녘에는 딸내미 대신 며느리를 내보낸다.’는 옛말도 있다. 이해는 간다.

산등성이에 올랐다. 어제 내린 비로 온 산하가 세수를 한 것 같다. 아니, 오랜만에 목욕을 했는지도 모른다. 묵은 때까지 박박 밀었을 것이다. 온갖 먼지덩어리와 연무찌꺼기 등 가뭄의 흔적들을 말끔히 씻어 내렸다. 내 마음까지도 개운하다. 저 멀리 지네모양을 한 경부선 열차가 시야에 들어온다.

봄 햇살 가득한 저 너른 벌판 너머에는 누군가가 나를 기다릴 것만 같다. 아마 기억도 가물가물한 첫 사랑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뜬금없는 그리움이 슬픔으로 변하여 목젖을 뜨겁게 데운다.

봄바람이 성깔(?)을 부린다. 나뭇가지는 윙윙하는 봄바람의 리듬에 맞춰 발랄한 스포츠댄스를 하고 있다. 지난해 영주 서천 둔치에서 아침마다 음악에 맞춰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던 아낙네들의 스포츠댄스 풍경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나무도 뿌리에서 꼭대기까지 자양분을 끌어올리려고 앞뒤로, 좌우로 자신의 몸을 열심히 흔들고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않아 피가 탁해진다. 고인 피는 몸을 병들게 한다. 맑은 혈액이 잘 돌게 하려면 좋은 음식도 중요하지만 뛰고, 내달리고, 흔들고 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

나무는 지금 피돌기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튼실한 열매도 맺을 수 있고, 둥그런 나이테 하나도 더 그릴 수 있다. 이렇게 자연은 생(生)의 흔적을 남긴다. 위대한 자연의 섭리(攝理)인지도 모른다.

김성한 수필가·성주우체국장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