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위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이하생략)
▷서울 출생. 연세대 영문학과 동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68년『사상계』신인문학상으로 등단. 현재 동아대 교수.
철학의 시조인 탈레스는 세상의 으뜸으로 물을 꼽았다. 물은 만물의 근원이요 불변의 진리와도 같다고 했다.
이른바 `원수설(原水說)’의 주장이 그것이다. 이 시 역시 물을 제재(題材)로 하여 인류 구원의 방법을 메타포하는 시의 형상화 작업이라 하겠다.
비극적인 전쟁(불)을 배격하고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 저 불 지난 뒤에 / 흐르는 물로 만나자’고 노래한 것도 불과 상극인 물을 통해 평화를 기구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일기 (시인 · 계간 `문학예술’ 발행인)
저작권자 © 대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