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그늘의 짙은 이끼처럼 악착같이 푸르른 삶이 기억한다네. 이 숲 그늘에서 총살된 애비. 해방 직후에 아득히 그런 살육의 그늘이 있었네. 새로 많은 잎들 해마다 그 기억처럼 돋아난다네. 그 애비보다 훨씬 더 늙어버린 흰머리 아들이 여전히 밭 갈며 숲 속 들여다보면, 총알이 그의 애비의 머리 뚫고 지나갔듯 신록이 그의 죽음의 기억을 더 푸르게 관통한다네.
여름은 숲의 밖을 더 맹렬하게 떠올린다네. 숲에 자리 깔고 앉아 푸른 계절을 위한 제의(祭儀)인 양 왁자하니 술판 벌이는 이들. 그 막걸리 냄새 갈아엎는 흙에 버무리며, “음복하시고, 잘들 놀다가 깨끗이 치워놓고 가시라”고, 햇빛 속에서 감자밭 가는 사내가 중얼거린다네. 다시는 그늘의 습기 안으로 들지 않으려는 그의 발바닥 굳은살이 흙 문대어 쭉 그어놓은 긴 선. 아무도 그 선 넘지 못한다네.
*영천 화북의 자천숲에서는 1946년 10월 양민들의 학살이 있었다.
▷▶이하석. 1948년 경북 고령 출생. 1971년 현대시학추천으로 등단. 시집: 투명한 속, 상응 등 다수
<해설> 자천숲의 400년 된 긴 역사는 그동안 지나왔던 일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