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귓바퀴 속을 걸어 들어가 봐
튤립 싹이 왜 귀부터 여는지 알게 될 거야
파도와 파도 사이
그 조용한 시간을 견디는 게
튤립의 전(全) 생(生)이거든
코끼리 코로 겨울을 견디는 오동나무 둥치나
손바닥 펴 보이는 맨주먹의 어린 싹만 하더라도
전 생을 맡긴 땅에다 귀부터 갖다 댔거든
왼쪽으로 세 번 오른쪽으로 두 번 또 왼쪽으로 한 번
길을 몇 번 꺾다보면
번호를 잊어버린 녹슨 금고 앞에 선 것처럼 아득해져서
어디 먼 데를 향해 귀부터 열게 되거든
파도의 귓바퀴를 한 바퀴 굴러 나오는 윈드 서퍼가
다음 파도를 기다리며 귀를 열듯이
튤립은 그 어디를 향해 귀를 열면서
죽은 새대가리 하나를 쑤욱 낳았던 거야
입도 뻥긋, 눈도 껌뻑 하지 못하는 새
▷▶천수호 1964년 경북 경산 출생.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민음사 刊.). 현재 명지대 강사
<해설> 파도 소리에 귀를 여는 튤립, 언제부터 녹슨 번호의 금고 앞에 선 것처럼 아득해졌다가 도로 굴렁쇠가 되어 굴려오는 파도에 귀를 틔우는 튤립. 그는 어디로 향해 귀를 열어 무엇을 들었으면 왜 새대가리 하나를 쑥 낳았을까? 죽은 바닷새를…. 제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