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종말로 몰아가는 것들
진정 종말로 몰아가는 것들
  • 승인 2015.03.12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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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규성 논설위원
어느 날 건강하게 보이던 한 남자가 갑자기 병을 앓게 되고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죽을 때가 다가온 것처럼 느낀 이 남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두 불러 놓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죽기 전에 꼭 하고픈 좋은 말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할 일도 많았고,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이 남자는 자신의 건강에 소홀했고 또 그 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가장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한 말과 저마다에게 필요한 말을 한마디씩 남기고 소홀했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한 동안 듣지 못했던 이 남자의 힘없고 흐릿한 목소리가 들리자 가장 가까이 있던 아내가 제일 먼저 뛰어왔다. 남자는 아내에게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으라고 말했다. 놀란 아내가 큰 소리로 아들들을 불자, 손자들까지 무슨 일인가 하고 침실로 모여들었다.

모두 모였다고 생각한 남자가 힘없이 눈을 뜨고 그 동안 생각해두었던 좋은 말을 차례대로 막 하려고 할 때, 아무래도 아버지의 상태가 위독하다고 생각한 한 아들이 “어머니, 의사 선생님을 불러와야겠어요.”하고 말했다. 뒤이어 또 한 아들이 소리쳤다. “친척들도 불러야 해요.” 그리고는 둘 다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남자의 계획은 먼저 가족들 모두를 불러 모은 다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동안 못 다했던 사랑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지 뭐, 이렇게 되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는 수밖에.” 남자는 의사와 친척을 부르러 간 아들들을 조금 더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광경을 본 어머니는 또 다시 혼비백산했고, 이번에는 딸이 “빨리 의사 선생님을!”하고 소리치며 방에서 뛰쳐나갔다. 또 다른 딸은 “혹시 신부님도 필요할지 모르니,” 하면서 신부님을 부르러 나갔다. 잠시 뒤 아들이 의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조금 뒤 딸도 돌아왔는데 그녀도 의사를 데리고 왔다.

남자는 의사도 친척도 신부님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말을 꼭 전하고 싶었던 가족들이었다. 남자는 “이래가지고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도 다 못하는 것 아닌가”하고 걱정했다. 이 남자가 고민하는 사이에 이번에는 친척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신부님도 도착했다.

모인 사람들 모두는 서로 서로 진찰을 끝낸 두 명의 의사와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한 의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의사의 말이 끝나자 또 다른 의사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분! 걱정 마십시오. 워낙 건강하신 분이라서 무사히 고비를 넘기실 겁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러자 두 의사가 논쟁을 시작했다. 가족들은 갈피를 못 잡고 어쩔 줄 몰라 했고, 친척들과 신부님은 당황했다. 한 의사는 곧 죽을 것이기 때문에 가족들이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의사는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 가족들을 걱정시킬 필요가 없다고 계속 주장했다.

누워서 생각에 잠겨있던 이 남자는 아직은 자신이 건강하고, 이 난국은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생사는 스스로 결정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두 의사가 계속 자기주장을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강요하는 가운데 가족들은 혼란에 빠졌고, 친척들과 신부님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남자는 크게 실망했다. 삶의 의욕은 사라져갔다. 자신이 진정으로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전하고 싶었던 가족들은 자신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정말 죽을병에 걸렸는지조차 확신하지 못 한 이 남자의 생명의 불꽃은 허무하게 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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