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어느 한 양반의 사생활
<대구논단> 어느 한 양반의 사생활
  • 승인 2009.08.1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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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흥 (대구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양반은 공(公)과 사(私)를 철저히 구분하였다. 학문·벼슬·사회생활은 공이고, 가정생활은 사였다. 양반의 공적인 부분은 잘 드러나며, 철저하게 유교적 윤리에 따라 행동하였다. 반대로 사적인 부분은 잘 드러나지 않으며, 도덕과 명분을 중히 여겨 자신의 세속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특히 양반에게 금기사항 중 대표적인 것이 금전문제이다. 다른 사람과 금전 거래를 하지 않으며, 만지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금전과 관련된 일을 하인이 대신 처리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토지거래나 국가에 대한 송사까지도... 그러다 보니 금전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을 극히 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 금전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 집착하는 면이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는 양반의 모습은 겉으로 드러나는 도덕과 명분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지, 사적으로 드러난 사생활은 아니었다.

최근 조선시대 양반의 사적인 생활을 엿 볼 수 있는 개인 일기나 편지가 주목 받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양반의 사생활(하영휘, 푸른 역사, 2008)’이다. 저자는 19세기 충청도의 양반 조병덕이 여러 사람에게 보낸 1,700여 통의 편지를 통해 당시 조선 양반을 해부하였다. 편지 내용은 금전거래, 빚, 가족 간의 갈등, 아들에 대한 실망, 시국에 관한 언급, 질병 등 개인의 사생활 중에서 가장 내밀한 내용이다.

편지 주인공 조병덕(1800~1870)은 세도정치기에 살다간 노론 벌열(閥閱) 가문의 후손이다. 당시는 신분제가 동요되고, 서구 열강이 문호를 두드리며, 천주교가 확산되었기 때문에 강상과 명분을 존중하던 양반으로서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는 노론의 적통을 계승한 학자로, 선대는 서울에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아버지-자신 3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자, 서울의 높은 물가를 견디지 못하고, 충청도 남포 삼계리로 이주하였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삼계리에 살면서도 서울 생활에 귀 기울이면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의 서울에 대한 지향은 아들 조장희를 서울로 보내 오랫동안 과거 공부를 하도록 한데서도 알 수 있다. 이후 아들 조장희는 삼계리를 벗어나 교통이 편리한 청석교에 살면서 아버지의 편지를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삼계리에 살면서 농업을 경영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수익을 올리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양반으로서의 체면을 중히 여겨 쓰임새를 줄이지 못하였다. 그 부족분은 토지를 팔아 메웠고, 이로 인해 점차 몰락하였다. 경제적 몰락은 가족의 구성에도 변화를 주어, 서울에서는 어른 21명에 노비 80명의 대가족이었으나 삼계리에 온 이후 다 흩어지고, 묘제(墓祭)에 수십 명의 자손 중 단 2명만 참석하는 지경이 되었다. 아버지의 제삿날에도 자식들 중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신분 의식은 여전히 철저하여 서얼 동생들을 가문의 종계(宗契) 회원으로 참여시키지 않았다. 심지어 친손녀들이 적서차별 않는 것과 그들(서자)에게 지나치게 공손한 것을 개탄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중요시 하던 종계마저도 조병덕이 죽기 얼마 전 파탄에 이르게 되었는데, 사람도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문의 예의를 지키기 위하여 업신여기던 평민 부자에게 돈을 빌리거나 토지를 팔았다. 그들을 무시할 수 없는 변괴로운 세상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생필품들을 어떻게 구하였을까? 생활에 부족한 물건은 시장에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낸 선물과 증여로 충당하였다. 보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수령으로 나간 친족 자제들이다. 그들은 예목전(禮木錢), 제수전(祭需錢), 요전(料錢) 등 명목으로 관아의 물건들을 조병덕에게 보냈다. 그는 평소에 수령들의 백성 착취를 비난하였다.

그래서 수령으로 나간 아들 조장희에게도 백성들을 가렴주구(苛斂誅求)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나 오히려 심한 착취로 유배되기 까지 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친족 자제들의 수령부임에 따른 선물과 증여는 당연하게 여겼다. 심지어 기한을 넘기는 친족 자식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조병덕이 사용하였던 종이와 묵, 육촉(초), 부채 등 일용품의 대부분은 친족 자제가 보낸 선물과 증여였던 것이다.

조병덕의 경우는 19세기 충청도 지방 한 양반 개인의 일상사이다. 오히려 당시에는 당연한 이야기 일 수도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중에서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또는 공적으로는 철저하나, 사적으로 이중적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적으로 올바른 것도 중요하지만 공을 통한 사적인 생활까지 올바른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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