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희 경북대 교수 “매 순간이 선택의 기로…하지만 내 삶에 쉼표란 없었다”
박남희 경북대 교수 “매 순간이 선택의 기로…하지만 내 삶에 쉼표란 없었다”
  • 황인옥
  • 승인 2015.04.1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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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예술인생’ 회고

미술적 자질 이끌어 준 스승들, 35년 작가·교육자 삶 살게해준 매개자로

8월 정년퇴임 앞두고 59년 전 그림일기부터 시대 순 작품 300점 공개

“퇴직 후에도 문화소외계층 봉사활동 등 사회 약자위한 열정 계속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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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경북대 미술대학 교수는 최근 열린 KBS방송총국 전시회에서 “제게는 작가와 교육자 둘 다 숙명이었어요. 예술이 창조라면 학문은 진리의 발견이니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었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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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 & Cosmos(2003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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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7월 29일 그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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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구름, 유성 그리고 빛(1987년 作).
“끊임없이 달리는 열차처럼 쉼없이 살았어요.” 브레이크 없는 엔진을 달고 쉼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회상할 수 있는 인생이 얼마나 될까. 오는 8월 정년퇴임을 앞둔 박남희 경북대 미술학과 교수는 “그동안 한 번도 쉬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 유용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항상 일을 찾았고, 그때마다 최선을 다했어요. 달리다 보니 가속도가 붙어 계속 달렸던 것 같아요. 그 달리는 힘이 제 삶의 동력이었다고 할까요”라고 고백했다.

박 교수의 예술과 이론 인생을 집대성하는 회고전이 대구문화예술회관 5개의 전시실에서 최근 열렸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교육자로, 작가로 살아온 지난 여정을 4개의 전시실에서 만난 것. 전시에는 박 교수가 처음 미술을 접한 초등학교 시기부터 최근 작품까지 모두 300여점이 걸렸고, 하나의 전시실은 제자들의 작품으로 메워졌다. 미술 피교육자와 교육자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 여정을 반추하며 ‘미술교육의 가치와 의미’를 돌아본 전시였다. 전시 제목이 ‘미술교육의 미술(Art in Art Education)’인 것은 자연스러웠다. 박 교수는 미술정규교육 수혜 1세대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코스를 밟은 엘리트다. 우선 학력이 화려하다. 경기여고와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프랑스 툴루즈(Toulouse)Ⅱ대학 미술사학과와 미술사학 박사를 취득했다.

그는 교육자로서도 분명한 역할을 해왔다. 지역 대학에서 미술대학의 설립 초기부터 성장기까지 30여년간 몸담았다. 대구가톨릭대학 예술대학 회화과 조교수를 거쳐 경북대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경북대디지털아트콘텐츠연구소장, 경북대미술관장, 경북대예술대학장, 사)전국여교수연합회장, 주)여성신문사 대구지사장, 경북도 문화재위원, 대구미술관 운영위원, 한국현대미성미술가회 공동대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했다.

◇ 미술작가·미술교육자 꿈을 키워준 스승들과의 만남

작가 박남희의 출발은 초등학교 3학년 시기 담임이었던 박휘락 선생의 그림일기 숙제로부터 시작됐다.

박휘락 선생이 미술교사여서 그림일기 숙제를 낸 것. 지금이야 새로울 것 없지만, 56년 전 그림일기는 획기적인 형식의 그리기이자 쓰기였다. 이 숙제가 훗날 교육자와 작가로 살게 될 박남희 인생의 두 가지 방향타가 되리라고는 숙제를 낸 박휘락 선생도 숙제를 한 소녀 박남희도 상상하지 못했다.

“56년 전인 1959년 7월 29일,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 3학년 여름날 그림일기에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온 식구가 미역국을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31일에는 커다란 대야에 집안 어른들이 동생을 씻기는 풍경이 그려져 있어요. 동생의 배꼽에 있는 분홍빛 탯줄이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더군요. 어렸지만 그림일기를 그리기 위해 굉장히 섬세하게 하루의 풍경을 더듬었던 것 같아요.”

당시로서는 독특한 그림일기 숙제는 소소한 일상들이 소재가 됐고 어린 박남희에게 주변을 관심있게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그 중에서도 어린 박남희에게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 남동생의 출생이었다. 남동생의 출생과 육아 과정은 어린 박남희에게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각인하는 일대 사건이 됐고, 이후 작가 박남희가 작품 속에 휴머니즘과 생명에 대한 경외를 일관되게 추구하는 모태가 됐다.

“그림일기를 쓰게 되면서 어린 나이였지만 제 주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고, 가족, 친구, 사회 등에 관해 무의식적이었지만 생각을 쌓아가게 됐죠. 한마디로 인문학적인 감성들이 그림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제 안에 축적됐던 것이죠.”

1959년의 그림일기 숙제는 그를 작가로 이끌기도 했지만, 동시에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의 삶을 살게도 했다. 그림일기를 통해 인문학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림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몸소 체득했고, 유학 후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게 된 것.

박 교수는 ‘미술과의 숙명적인 만남’의 최대 매개자로 망설임없이 자신을 길러준 스승들을 꼽았다. 그의 어린시절 스승들이 그의 내면에 숨겨진 미술에 대한 자질을 끄집어 내고, 격려하고, 성장하게 한 것. 첫 만남이 박휘락 선생이었다면, 두 번째 운명적인 만남은 그가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기 위해 찾아갔던 대구미술연구소를 운영한 고(故) 서석규 선생이었다. 서 선생은 소녀 박남희의 그림일기를 보자 대뜸 “개인전을 하자”며 ‘11세 소녀 박남희 개인전’을 추진했고, 결국 성사시켰다.

“당시 선생님께서 제 그림에서 어리지만 ‘나름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아요. 저의 개인전은 어린 제게는 엄청난 사건이었고, 당시 사회에서도 제 전시 기사가 신문에 날 정도로 전대미문의 희귀한 일이었어요. 돌이켜보면 이 전시가 소녀 박남희가 미술가의 꿈을 키우는데 쐐기를 박은 사건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후 그는 계명대 미술대학 이영융 명예교수, 김신현 서울 미대 선배 등의 스승으로부터 그림을 배우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 생명 경외, 작품에 녹이고, 예술전도사로 후학 양성

서양화가 박남희는 지금까지 개인전 24회, 50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하며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해 왔다. 이념은 일관되되, 방법론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며 전업 작가 못지 않은 창작세계를 구현했다.

특히 박남희의 작품에는 ‘빛 속을 부유하는 인간’이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역동적이면서도 몽환적이며, 밝은 색채감은 환희마저 깃든다. 박 교수는 ‘빛’과 ‘생명 존중’으로 자신의 작품을 이념적으로 수렴했다. “제 작품은 공간에 부유하는 빛을 어떻게 회화로 표현하는가로 출발해 인간 생명의 기원을 찾는 것으로 귀결되죠.”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빛’과 ‘생명 존중’이라는 주제의 모태는 어릴적 겪었던 두 개의 기억과 관계된다. 소녀시절 계산성당 결혼식에 화동을 도맡았는데, 그때 신랑 신부 앞에서 성당을 걸어들어가며 보았던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쳤던 영롱한 빛의 향연이 첫 번째 기억이며, 초등학교 3학년 시기 동생의 출생으로 느꼈던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두 번째 기억이다.

“결혼식에 입장하면서 본 빛은 마치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초현실 세계의 판타지처럼 신비롭고 몽환적이었어요. 너무나 강렬했죠. 동생의 출생과 여린 아기가 어른들의 보살핌으로 조금씩 인간의 모습을 갖춰가는 것을 보며 어린 나이였지만 생명에 대한 신비로움 같은 것을 어렴풋하게 느꼈던 것 같아요. 이 두 가지 기억이 결국은 계속 잔상으로 남아 후에 저의 작품 세계를 일관되게 흐르는 기본 정신이 됐어요.”

일관된 이념을 작품에 구현하는 방식은 한 가지 방식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을 접목하며 전개됐다. 처음 순수 추상으로 시작해 미술사 연구를 기본으로 하는 지적 기하학, 그리고 보다 구상화된 도시적인 이미지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해왔다. 특히 다양한 소재에 대한 도전은 미래지향적이다. LED회로를 화면 뒤에 부착해 유화물감의 색채의 빛과 현조하는 빛의 조화를 구사하기도 하고, 캔버스에 하이테크를 끌어 들여 아방 가르드를 지향하기도 했다. 그녀의 독보성이 돋보이는 도전은 디지털 프린팅을 회화적으로 응용한 디지털 페인팅 작업에서 절정을 이뤘다.

“메시지의 덫에 갇히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영혼의 자유,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였죠. 그 대상이 인간이었다고 할까요. 제가 바라보는 인간은 비관에 빠진 인간이 아닌 무언가 하려는 인간인데, 이것은 인간생명의 근원을 찾다가 나온 결과물이죠. 작품 속 이념은 변하지 않았지만, 표현에 있어서는 변화를 거듭했어요. 자유를 위한 일종의 도전이었죠.”

그는 유학 후 대구가톨릭대 예술대학 회화과 조교수로 잠시 제직하다 경북대 예술대학 미술학과가 발족되자 곧바로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30여년 전인 1982년의 일이다.

“어린시절 제게 미술을 가르치셨던 스승들께서는 제게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단지 제 안에 있는 미술에 대한 재능, 갈망들을 끄집어 내 주셨죠. 저의 스승들이 제게 가르친 것은 재능보다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어요. 그림 속에 저를 집어넣어 주신 것이라고 할까요. 그것이 바로 미술교육자의 역할이라고 무언으로 배운 것 같아요. 제가 받은 것을 스승들처럼 제 제자들에게도 전해 주고 싶어 교육자의 길을 선택한것 같아요.”

2006년부터 박 교수는 본격적으로 경북대 미술대학의 비전을 만들고 하나하나 실현해 갔다. 디지털아트콘텐츠연구소를 신설하고 연구소장을 맡았고, 미술관도 만들어 미술관장도 역임했다. 미디어아트 석박사과정을 만들고 예술대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그는 경북대 미술학과의 개척자이자 산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일선에서 하나하나 이뤄나갔다.

“당시에 분명히 존재했었던 대학 내에서 예체능계열 비하 분위기가 싫었어요. 예술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내 한몸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새로운 일들을 전투적으로 추진했죠. 예술전도사로 최선을 다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 환경이 페미니스트 만들어

그의 이력난에는 주)여성신문사 대구지사장, 한국현대여성미술대전 운영위원장, 대구경북여교수회장 등의 여성과 관련된 이력들이 포진해 있다. 페미니스트라고 해도 이견이 없어 보일 만큼 적극적인 활동력이다. “프랑스 유학 후 남자를 제치고 교수가 됐어요. 하지만 당시만해도 여성에 대해 상당히 보수적인 사회였어요. 특히 미술과는 더 심했죠. 당시 9명의 교수 중에서 여교수는 1명이면 된다는 분위기였다면 짐작하실까요. 저 말고는 여교수를 뽑지 않았죠. 그런 분위기를 지켜보며 저절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밖에 없었죠.”

박 교수는 여교수의 수를 늘리기 위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여교수 채용비율과 관련한 논문을 쓰고 주제발표를 했다. 또 대학운영위원회에 참여해 여성이 가진 긍정적인 덕목들을 호소하며 여교수 역량강화에도 힘을 보태기도 했다.

◇ 퇴직 후에도 예술과 학문은 계속된다

박 교수는 미술대학의 성장 기반 마련과 학교내 여성 인권 시장을 위한 활동 등의 진취적인 일들을 할 수 있었던 힘으로 ‘미술’을 거론했다. “미술을 했기 때문에 그런 창조적인 생각들을 할 수 있었다고 봐요.”

그림만 그렸다면 더 큰 화가로 성장했을지 모른다. 그 역시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와 교육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그는 결국 어느 것도 놓칠 못했다. 박 교수는 “둘 다 숙명이라 여겼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예술이 창조라면 학문은 진리의 발견 아니겠어요. 휴학 후에는 이론과 창작 사이에서 갈등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미술교육자의 역할도 놓칠 수 없는 사명으로 여겨 결국 두 길을 함께 가는 것을 선택했지요.”

그가 내리는 작가와 교수로 산 35년의 결산이 궁금했다. 그는 즉답 대신 최근 열렸던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의 회고전을 언급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지금까지의 평생의 창작품을 제자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하며 미술교육의 의미를 되돌아본 이번 전시야말로 결산의 결과물 아니겠냐는 것.

후회없는 삶이었다고 말하기보다 항상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고 말하는 박 교수는 오는 8월 퇴직을 앞두고 있다. “퇴직해도 변할 것은 없어요. 학문과 예술세계는 그대로 갈 것이고요. 그동안이 예술·행정 쪽에 온 에너지를 쏟았다면, 이제부터는 사회 약진, 문화소외계층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남은 열정을 불사르며 계속해서 쉼없이 달려갈 것입니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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