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그 할아버지는 그 무서운 세상에서도
<대구논단>그 할아버지는 그 무서운 세상에서도
  • 승인 2009.09.3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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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후섭 (아동문학가 · 교육학박사)

지난 토요일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전국 세미나가 부산에서 열렸다. 이곳에서 행사를 마치고 저녁에 광안리 해변을 거닐며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평소에 존경해오고 있는 서석규 선생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사실 이튿날 직장 행사 때문에 초저녁에 대구로 오려고 했지만 서석규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일부러 열두 시까지 남았던 것이다.

서석규 선생은 1955년에 이미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온 원로 아동 문학가이면서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을 지낸 언론인이기도 하다. 또 모 소주회사 사장으로 초빙되어 종이팩 소주를 개발하기도 한 기업인이기도 한데, 지금도 전공인 화학을 살려 여러 연구를 위해 전국을 답사하는 노익장이시다.

해변을 거니는 동안 일부 원로 문학가들의 친일 행각과 그 자세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 쏟아졌다. 필자는 이 비판을 들으면서 역사 앞에서 참으로 떳떳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훌륭한 삶을 영위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야기 중에 자신의 할아버지를 예로 들었는데 그 이야기 속에서 선조들의 꼿꼿한 지조에 대해 존경심이 절로 우러났다. 선생의 할아버지는 대전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셨는데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단호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겁을 내는 편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선생의 아버지가 잡지 한 권을 얻어다가 선생에게 주었다고 한다. 시골에서 별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어렵사리 잡지를 구해온 것이었다. 열두어 살이었던 선생은 아버지가 주시는 잡지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넘겨보곤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할아버지가 부르셨는데 그 잡지가 바닥에 펼쳐져 있더라는 것이다. 그 잡지에는 당시 일본의 왕과 장군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선생을 꿇어앉혀놓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윽고 무거운 침묵이 지나고 겨우 입을 열었는데, `내가 왜 너를 불렀다고 생각하느냐?’하고 묻더라는 것이었다.

선생이 한참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쭈물거리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담뱃대로 일본 왕과 군인들의 사진을 마구 두들겼다고 하였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 때여서 그러한 행동이 일본 경찰에게 알려지면 경을 칠 것이 분명한 때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누가 볼세라 마당을 내다보며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때 추상같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다고 하였다. “누가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분간도 못하면서 어찌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느냐?” 마침내 잡지 속의 사진은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아이들 책에다 이 따위 것을 실어놓다니!”

할아버지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연신 두들기다가 마침내는 북북 찢어버리더라는 것이다.
선생은 친구들에게 좋은 잡지가 있다고 자랑을 해놓았는데 잡지가 찢어지자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며 발을 동동 굴렀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쇠죽 아궁이에 너덜너덜해진 잡지를 던져놓고는 불을 때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선생은 할아버지의 행동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때 자신의 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많은 나이가 된 지금에 와서야 당시 할아버지의 진정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토로하였다.

자신도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가 많은데 과연 당시의 할아버지처럼 감동을 주면서 동시에 단호하고 강렬하게 손자 손녀들을 훈육하고 있는가를 반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선조들의 참다운 지혜가 그리워진다.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이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바른 태도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어야 하는 준엄한 책임이 우리들 모두에게 부여되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책임을 다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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