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안중근의 의거와 동양평화론
<대구논단>안중근의 의거와 동양평화론
  • 승인 2009.11.01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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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흥(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헤이룽성 하얼빈 역에 6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일본의 정치 거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총을 맞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숨졌다. 전 일본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공을 기려 장례를 국장으로 지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당시 조선 황실 궁내부 사무관으로 있던 곤도 시로스케(이언숙 옮김, 대한제국 황실비사, 이마고, 2007)는 “러·일·중 3개국 세력의 각축장인 국제도시 하얼빈에 한 발을 내딛고 러시아의 문무 관병과 악수를 나누는 찰나, 이름도 없는 일개 조선 청년의 권총에 맞아 영웅적인 위대한 죽음을 맞았다.

조선을 사랑하여 조선인과 가장 가까웠으며, 조선에 문화 혜택을 주었고, 조선인들에게 크고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이토 공작이 오히려 그가 사랑하던 조선인 손에 귀중한 생명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은혜를 피로 갚는 이 비극에 직면한 당시 궁중은 놀라움과 추모의 분위기를 넘어 국운과 왕실의 앞날을 걱정하며…”라고 하였다. 이 글은 그를 궁내부에 채용시켜 준 이토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며, 아마 일본인들의 솔직한 감정일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궁내부 사무관으로 15년간 조선 황실에 근무하였다.

죽은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 메이지 헌법(1889)의 초안을 마련하고 양원제 의회(1890)를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한국을 강제 합병시키는데 공을 들인 인물이다. 이토는 1905년 11월 9일 특명 전권대사로 조선에 부임하면서 온갖 협박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는 한편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후 그는 일본의 침략을 미화하기 위하여 순종을 앞세워 부산-대구-의주 등 전국을 순행하면서 통감부와 순종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였다. 오늘날 대구역에서 북성로, 수창동을 거쳐 달성공원으로 이르는 길이 `순종황제 어가길’이다. 당시 굴종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토는 조선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대륙진출의 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중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1905년 러일전쟁 최고의 격전지였던 뤼순의 `203고지’에 올라 “오랜만에 듣는 203고지/1만8000명의 뼈를 묻고 있는 산/오늘 올라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하늘을 바라보니 산머리에 흰 구름이 둘러져 있네.”라고 시를 지어 대륙진출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총을 쏜 30대 조선 청년은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의 러시아 말)”를 외쳤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뤼순감옥에 144일 동안 갇혀 있다가 1910년 3월 26일, 33살의 젊은 나이에 처형되었다. 이토의 대륙 진출을 저지하려던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인 안중근이다.

안중근은 러시아의 예비심문과 재판과정에서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라 거사동기를 밝혔다. 일본측에 인계된 이후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의 재판과정에서도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재판을 거부하였다.

또한 이토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의 죄상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로, 한국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의사(義士)로 극과 극을 달린다. 그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옥중에서 집필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를 통해 의사만이 아닌 교육자, 동양 평화를 주장한 사상가로 적극 재평가되고 있다. 특히 `동양평화론’은 미완성 유고지만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토가 `극동평화론’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반면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러시아의 제국주의에 한·중·일 3국이 공동 대응하고 연대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3국의 평등한 발전을 구상했다.

이에 뤼순을 중립지대로 하고, 3국의 동양평화회의 설치, 공동 평화군 창설, 공동 경제개발, 공동 개발은행, 공동 화폐발행 등을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동양평화론’은 한낱 망해가는 조선 청년의 허상일까. 오늘날 구현될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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