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든 아내의 눈두덩을 보다 못해
억새꽃 한아름 꺾어다가
오지 동이에 꽂아 놓았다.
할머님이 물려주신
마음 비운 지 오랜 오지 동이
아가리가 커서 궁상맞더니만
인제야 임자를 만났구나.
맹물 만으론 채울 수 없는
허기진 세상에서 억새꽃을 만나
한아름 통째로 받아 놓고 보니
푸짐하고 넉넉도 하다.
거실이 삽시에 환해지는구나.
찌든 아내의 눈두덩에
주름이 펴지는구나. 옳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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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출생.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4년 `한국문학’에 시 「삼다도」가 신인상에 당선돼 등단. 고교교장 역임. 제주도문화상(1994)등 수상. 시집으로 「삼다도(三多島)」(1993)등이 있다.
어떤 사물의 존재 의미나 가치란 항상 고정돼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 시인은 시로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억새꽃’이다. 가을 벌판이나 강변 등에서 쉽게 볼수 있는 억새꽃 그 자체는 별다른 의미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또 할머님이 물려 준 아가리가 커서 궁상맞던 오지 동이 역시 별다른 존재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있었다. 그런 억새꽃과 오지 동이와의 만남은 어두운 거실을 환히 밝히고 있을뿐 아니라 `찌든 아내의 눈두덩에/ 주름이 펴지는’ 위력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위력이 곧 시인의 직능이 아닌가 싶다.
이일기(시인`문학예술’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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