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오가는 사투 속에
고지 탈환 위해 계속 전진
널브러진 전우 시신 충격
철원 쳐다볼 엄두도 안 나”
6일은 현충일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현충일이지만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6·12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는 등 올해 현충일에 대한 감회는 새삼스럽다. 6·25전쟁이 발발한지 어언 68년, 무심한 세월이 흘렀지만 참전 노병들의 뇌리에 남은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6·25 참전 용사들의 얘기를 통해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살아 돌아온 게 천만다행이여. 근데 아직도 그때의 모습이 생생해. 잊히질 않아.”
지난 1일 오후 3시께 6·25참전유공자회 대구 동구지회에서 만난 이영태(86) 씨는 1·4후퇴 때의 아찔했던 순간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이 씨는 군장에 넣어둔 모포 2장 덕택에 날아오던 총알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포탄의 파편을 피하지 못해 왼쪽 눈이 크게 다쳤다. 이후 몇 차례 병원을 찾았지만 다시는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이 씨는 긴박했던 당시 함께 후퇴했던 중대장 유화복 중위를 회상하며 끝내 고개를 숙였다.
“부산 출신인 유 중위가 그때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했어. 유가족들과 연락을 하고 싶어도 알 길이 없어. 여태까지 말야.”
유 중위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이 씨는 그의 숭고한 희생을 반년 넘게 가슴속에 담고 있었다.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한 신재균(86) 씨 역시 참혹했던 그날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제주도에서 96일 동안 군사교육을 받은 신 씨는 숨돌릴 새도 없이 강원도 양양의 한 산골로 투입됐다. 그리고 얼마 후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신 씨는 8부 능선에서의 사투를 떠올리며 전쟁의 잔혹함을 쉽게 지울 수 없다고 했다.
“무전병이었던 나는 뒤에서 전우들이 쓰러지는 장면을 똑똑히 봤어. 지리적으로 위치가 불리하다 보니 올라가는 족족 쓰러졌지. 딱히 방도가 없어 보였어. 그런데 우린 계속 전진했지.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아무도 몰러….”
신 씨의 말을 듣던 이헌철(87) 씨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속은 달라도 참담했던 그 현장에서 같이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
1950년 8월 18일, 당시 19살의 나이로 입대한 이 씨는 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강원도 철원 방면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폭격에 의해 벌거숭이가 된 산, 그나마 겨우 솟아 있는 나무에 널브러져 있던 시신들의 모습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던 것.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포탄이 떨어졌지. 하늘을 뒤덮었어. 그때가 휴전되기 직전이라 그런지 엄청 치열했었어. 죽은 전우들의 얼굴이 가물가물하네.”
한편 오는 25일은 6·25전쟁 68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구지방보훈청은 대구그랜드호텔과 경산시민회관 등지에서 국가유공자 및 유족을 위로·격려하는 행사를 열 계획이다.
윤주민기자 yjm@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