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복 시인 ‘암바라와의 꽃’展…6일까지 대구시립중앙도서관
이태복 시인 ‘암바라와의 꽃’展…6일까지 대구시립중앙도서관
  • 황인옥
  • 승인 2018.07.0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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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이야기, 문인들이 복원할 차례”
인니 암바라와 위안부 숙소
강제징용자 근무 초소 촬영
방치된 현장 안타까움 토로
현지 거주하며 생존자 수소문
恨 달래려 살풀이 펼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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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복 시인 作.

비바람만 피하도록 얼기설기 형태만 갖춘 건물에서 슬픔이 짙게 배어 나왔다. 허물어져가는 폐가가 주는 음산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관과 실내가 감옥을 방불케 했다. 흡사 짐승우리처럼 병렬식으로 나열된 실내는 좁았고, 높게 난 창살을 통해 겨우 햇볕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인도네시아 중부자와 스마랑 암바라와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숙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자 이태복(사진) 시인의 ‘암바라와의 꽃’전에 걸린 사진이다. 전시는 6일까지 대구시립중앙도서관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시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이 하루에 60~100여명의 일본군에게 성 착취를 당한 곳”이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암바라와 위안부 수용소의 존재는 2014년에 세상에 알려졌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故 정서운 할머니가 증언을 하면서다. 이 수용소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사용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딸려 있다. 중세 유럽 고딕 양식의 위용을 갖추고 있는 이 건물은 1838년부터 1845년까지 약 7개년에 걸쳐 네덜란드에 의해 군사적인 용도로 건설됐다. 태평양 전쟁 기간인 1943년부터 45년까지는 일본군이 접수해 포로수용소로 사용했다. 인도네시아는 350년간 네덜란드의 통치를 받은 역사가 있다.

“이곳에는 일본군위안부 뿐만 아니라 조선 청년 700~1,000여명이 강제 징용되어 포로 감시원으로 근무하다 종전 후 전범으로 처형되거나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싸웠어요. 조선인이게는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죠.”

위안부 숙소는 포로수용소 바로 뒤편에 일렬로 3 개동이 지어졌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소녀들은 조선과 중국, 동남아시아 등 다양했다. 당시 13살 가량의 조선인 소녀 23명이 암바라와로 끌려와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 “그 중 14명은 풍토병이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9명은 일본군이 떠날 때 버려두고 떠나 여기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그의 증언이다.

이태복 시인 역시 정서운 할머니의 증언을 알고부터 암바라와 위안부 수용소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25년전에 인도네시아로 이주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은 암바라와에서 차로 15분 거리로 지척이다.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사산 자바 문화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암바라와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발굴하려 노력하는 한편 살풀이춤을 현지 춤꾼들과 공연하며 그들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달래고 있다.

일본군은 연합군에 쫓겨 도망가면서 암바라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소녀들에게 간호복을 입힌 후 버려두고 떠났다. 일본군 위안부 존재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태복은 살아남은 암바라와 조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소식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러나 작은 흔적 하나만 건졌을 뿐 그들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살아남은 소녀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돌아갈 방편이 없었죠. 한 소녀는 네덜란드 한인회를 찾아갔지만 화냥녀 취급을 받으며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죠.” 그는 인도네시아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수리 수깐디를 할머니를 찾아갔지만 위독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분이면 어쩌면 살아남은 조선 소녀들의 자취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번 전시에는 위안부들의 숙소와 함께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이 근무한 초소와 수용소 전경 등을 찍은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시인은 역사적인 현장이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고 있어 언제까지 보존될지 알 수 없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대구문인협회 전 회장이자 한국수필협회 이사장인 장호병과 공광규 시인, 대구문인협회 등에서 암바라와 조선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발굴하는데 노력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대구에서 발행되는 계간지 ‘문장’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한 많은 삶을 살다 스러졌을 할머니들의 아픈 역사를 반드시 밝히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돌이킬수는 없지만 사진으로 흔적이나마 남겨두게 다행스럽죠. 이제부터는 문인들이나 역사가들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복원할 차례라 생각해요. 저는 암바라와에서의 그들의 활동에 최대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황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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