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극재 정점식 (14) 동서양 화법 버무린 氣의 결정체
[서영옥이 만난 작가] 극재 정점식 (14) 동서양 화법 버무린 氣의 결정체
  • 황인옥
  • 승인 2018.07.19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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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화실 마련 서진달 등과 교류
1941년까지 교토 전문학교서 수학
1953년 첫 개인전 이후 활동 본격화
“작업은 찾는 게 아니라 마주치는 것
무의식에 숨어있다 우연히 현현한 것”
그림 그리기보다 ‘정신 조형’ 가까워
2005년대구미술비평연구회고문정점식
2005년 대구미술비평연구회 고문 정점식, 두산갤러리.

2009년 6월 어느 날이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故 극재 정점식 선생(이하 극재)이 입원한 병실로 갔다. 당시 방천시장예술프로젝트 전체기록을 담당했던 필자는 병실에 누워있는 극재에게 시장과 예술의 접점을 모색하는 예술가들의 노력과 예술의 옷을 입고 변모하는 전통시장 얘기를 들려주곤 하였다. 대구에서 진행되는 공공미술이어서인지 병상에서도 극재는 방천시장예술프로젝트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링거와 호스를 제거하고 좀 더 자유로운 몸이 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고 싶은지를 물었더니 방천시장 구경과 변모하는 시장을 스케치하고 싶다고 하였다. 예술(또는 삶)의 미완을 실감했던 것일까? 아니면 답은 없지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예술임을 자인했던 것일까? 삶의 종지부를 찍어야할 순간에도 화가의 본분을 지각하던 극재는 뼈 속까지 화가였다.

혹자는 이러한 극재의 예술 언어가 모호하고 어렵다고 한다. 극재도 대중의 반응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극재는 ‘예술이 목적하는 바는 물질이 아닌 비 물질(非 物質)이고 비 물질이라고 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작가를 외롭게 한다’며 자신만의 예술 언어를 모색하는데 집중했다. 극재는 시인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 1842-1898)가 ‘어떤 대상(對象)을 확실히 지시하는 것은 시(詩)의 행복을 4분지 3을 잃게 하는 것이며 조금씩 추찰(推察)하는데 그 행복이 있다’고 한 것에 자신의 예술 지향점을 기대기도 했다. ‘작업이란 찾아내는 것이 아닌 우연한 마주침이고 무의식(無意識)의 현현(顯現)이라는 것이 극재의 지론이다. 극재의 말을 직접 옮겨보면 이렇다.

“한 작가가 그의 이미지를 직접 그대로 작품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즉흥적인 크기로서는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작품이 태어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눈에 뜨이도록 도식적(圖式的)으로 굳어있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찾고 있던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어떤 섭리(攝理)에 의해서 우연히 마주친 것의 발견이다. 그것은 선험적(先驗的)인 것이 아니라 무의식(無意識) 속에 내재(內在)하고 있던 것이 어떤 어려운 경로를 거쳐서 우연히 현현(顯現)된 것이다. 이 마주치는 새로운 동기나 충동은 제작의 과정에서 수시로 일으키는 것이며 말라르메가 말한 시의 행복이란 이것을 뜻한 것이다.” (정점식,「안개속의 언어」) 중에서

이와 같은 예술의지를 가진 극재의 작품은 서양화로 분류된다. 그러나 표현법은 동·서양화의 교차점에 자리한다. 작품이 지닌 차별화는 작가의 의지나 신념의 소산이지만 시대의 반영도 간과할 수 없다. 시대의 반영에서 주목할 것은 한국 근대미술의 태동기를 1920년대로 상정할 때 이 시기와 극재가 출생한 1917년이 맞물린다는 점이다. 한국에 서양화 양식이 도입된 것은 서구에서 신문화가 유입되던 20세기 초 문호개방기이다. 이보다 앞선 17세기에 북경을 통한 서양문화의 접촉과 천주교의 전래 그리고 실학사상의 발전 등으로 전통회화 양식에 서양의 조형방법이 이식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홍원기는 대구화단의 초기인 1920년대 초엽을 지역미술의 맹아기라고 보고, 이 시기는 “아직 시·서·화 겸비라는 왕조시대 양반문화의 연장선상에서 한시문, 전통화, 서예, 동양화 등이 융합되어 장르구분이 미분화된 상태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상정의 서양화 개인전(1921년)을 시작으로 1925년에 이르러서야 서양화 영역이 화단에서 독립된 장르로 자리를 잡는다.” (홍원기,『대구의 근대 예술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p.45)
 

극재의드로잉판화-2006년
극재의 드로잉 판화 2006년. 서영옥 제공

한국 근대미술 태동기에 활약한 서양화가들 가운데 1910년대 한국의 1세대 서양화가는 ‘고희동(1886-1965), 김관호(1890-1959), 김찬영(1893-?), 이종우(1899-1981)’등이다. 이들은 5년제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고 졸업한 후 귀국하여 한국의 서양화 도입에 일역한다. 1920-1930년대 독일과 프랑스 미국에서 활동한 배운성(1900-1978), 이종우, 임용련(1901-?), 백남순(1904-1994), 나혜석(1896-1946)의 활동상도 주목된다. 대구의 서양화는 “1921년 개인전을 개최한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1897-1947)에 의해서 도입되고, 그의 제자 서동진(1900-1970), 이여성(1901-?), 최화수(1901-?), 김용준(1904-1967), 박명조(1906-1969), 이인성(1912-1950) 등의 활동에 의해 1930년대에 만개한다.”(홍원기 앞의 발제문 p.45 참고)

이인성보다 5살 아래인 극재는 1930년대 대구 서양화단에서 이름을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극재의 나이는 10대였다. 만 17세(1929년)에 조선미술전람회 입선과 연속 6회 특선(제10~15회)에 이어 25세에 추천 작가(제16회~)로 명성을 날리던 이인성에 비하면 대구 서양화단에 기록될 만큼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1930년대(1933-35년) 극재는 대성학원 문과를 수학하고 20세(1937년)에 대구 남산동에 화실을 마련했다. 화실 개실은 극재가 화가의 길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화가 김용조, 박재봉, 서진달 등과 만났다. 이듬해인 1938년에 남조선 미술전에서 입선(대구상공진열관 전시)을 하고 같은 해에 교토 시립회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41년에 졸업한다. 입학 후 1940년까지 일본 독립전에 가담하는 등, 일본에서도 예술 활동을 한다.

그러나 교토의 정통적인 색채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극재는 도쿄 등을 여행하며 일본의 아방가르드적인 미술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당시에 극재는 일본의 기하학적인 큐비즘과 초현실주의, 아나키즘적인 다다이즘과 같은 사조에 관심을 가졌다. 1941년 교토 시립회화전문학교를 졸업한 극재는 만주로 건너가 한국 교포를 위한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1946년에 귀국한다. 극재가 귀국할 당시 대구의 서양화단에는 서동진, 박명조, 주경, 서병기, 배명학과 같은 자연주의계 선배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이유는 추구하는 예술의 방향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일련의 행보를 통해 대구화단에서 서양화가 꽃피기 시작하던 1930년대에 극재는 화가의 길로 들어섰고, 1940년대는 일본 유학과 만주라는 타지생활과 일제강점기였던 만큼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치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극재가 본격적으로 추상미술을 전개하기 시작한 시기는 1953년 첫 개인전 이후부터라는 윤곽이 드러난다. 1940년대의 작품 <고가>(1945)나 <하얼빈>(1945)연작 시리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고가>와 <하얼빈>시리즈는 기교를 뺀 담백한 구상작품으로 1950년대 이후의 표현방식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극재는 국방부 종군화가단 간사(1951-60년)와 경북 선산 오상중고등학교 미술교사(1952-1954)를 거쳐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교사(1954-1962)를 하던 1955년에 대구미술가협회를 발족한다. 대구미술가협회 창립전을 대구미국문화관화랑에서 개최한 1950년대가 극재에게는 본격적인 예술 활동의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1920년-1950년, 약 30여 년간 변화를 겪으며 다져온 극재의 작업방식은 ‘그리다’보다 ‘조형하다’가 더 적절할 것 같다. 극재는 사물의 형상묘사에 주력하기보다 정신을 조형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극재의 드로잉과 페인팅은 동양과 서양화법에 기인하여 조율한 기(氣)의 결정체이다. 매체가 순차적으로 포개어지면서 비구체적인 형상으로 드러난 것, 가상에 현실을 버무리고 현실이 또 다른 현실과 겹쳐지면서 일구어낸 비현실경이다. 이것은 길고 짧은 호흡과 사유를 굴절시켜 나타낸 데페이즈망(Depaysement-일상적인 관계에서 사물을 추방하여 이상한 관계에 두는 것)이기도 하다. 정신적 스팩트럼이 파장을 일으키면서 믹스되고 걸러지면서 형성된 뼈대이다. 담백한 그것은 정신의 육화라 할만하다.

서영옥ㆍ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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