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時)
사랑의 시(時)
  • 승인 2018.12.2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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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시인)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설레는 일이다. 만남 그 자체보다 오히려 기다리는 순간들이 더 긴장되고 흥분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카드가 교보문고 후문, 한 귀퉁이로 밀려나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대형서점이나 문방구 중심에 세워진 무대의 주인공이었던 카드가 다중 미디어들이 창궐하는 시끌시끌한 시대에 떠밀려 아웃사이드로 내몰리고 있다. 터치 한번이면 듣고 보고 말할 수 있는 세상, 한 자 한 자 눌러쓴 손편지의 온기가 그리워지는 것은 책장 속 책처럼 가슴 깊이 꽂아 둔 편지를 생의 한기가 찾아들 때면 가끔씩 꺼내 다시 읽으며 시린 가슴을 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신병 수료식을 마치고 돌아 와 처음으로 받아 본 아들의 손편지를 떠올려 본다. 하룻밤 묵고 왔다면 아쉬움이 덜했을까. 대구에서 강원도 홍천까지 네다섯 시간을 달려갔다가 허락된 여섯 시간도 찰나처럼 보고 왔던 첫 면회 후, 대문 앞 우체통 앞에서 늘 서성거렸었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벨이 울리던 날, 비로소 오랜 기다림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듯 편지가 왔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 듯 조심스레 ‘군사우편’이라 적혀진 봉투를 열었던 그때, 그 설렘을 지금도 난 생생히 기억한다.

//(...)집까지 안전하게 들어가셨는지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엄마, 아빠, 누나 모두 나 하나 보겠다고 새벽에 일어나 준비하고 오느라 많이 피곤하고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용케도 아들 보러 이 먼 곳까지 와줘서 무지 고맙고 행복했어요.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지와 봉투 그리고 볼펜까지 챙겨주고 가서 군 생활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고 있어요. 면회 마치고 훈련소를 떠나 지금은 홍천에 있는 야전수송사령부로 도착했어요. PX이용이랑 텔레비전시청 그리고 전화는 당분간 사용할 수 없어요. 일정기간이 지나면 어쨌든 편해질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아빠, 엄마에게 군대 이야긴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엄마가 아빠 얘기만 듣고 군 생활이 힘들 거라 앞서 생각하며 걱정하는 거 싫어요. 나는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항상 좋은 쪽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이 편지 받고 읽으면서 우리 엄마, 또 우는 건 아니겠지요? 울지 말고 가족 모두 건강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아들하고 처음 떨어져보는 거라 많이 힘들겠지만 자대배치 받으면 평상시와 같은 느낌을 가질 수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끝으로 면회 오셨을 때, 웹툰을 보느라 휴대폰만 만지고 있어서 죄송했어요. 사실은 나 역시 엄마, 아빠 그리고 누나가 너무 많이 보고 싶었었어요. 또 쓰겠습니다.(...)/아들은 그 후, 사단의 운전병을 배차관리 하는 행정병으로 소위 말하는 ‘꿀 보직’에 배치되어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제대를 했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당차게 개척해 나온 아들에게 큰절이라도 하며 “너를 사랑한다”고 만세 삼창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 행상인의 처가 지었다는 ‘정읍사’에는 행상을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무사안녕을 달에게 기원하는 간절한 발원이 담겨 있다. 무엇을 하고 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는지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을 달에 의탁하여 노래하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기다림의 깊이가 아이에게로 더 넘어가는 것은 여자에서 엄마로 바뀐 탓이지 않을까.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중 한 대목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던 말이 떠오른다. 그동안 수없는 오르막을 올랐으니 자식에게만은 내리막길만 있었으면 하는 게 엄마 된 심정이다.

오늘도 나는 대문 앞 우체통 안을 기웃대며 서성거려 본다. 그러나 영원히 곁에 두고 살리라 믿었던 아들의 방 한 켠 세워져 있던 달력은 아이가 취업 떠나던 날 그대로 더 이상 넘어가지 않은 채 멈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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