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하나 통째로 넣고 끓이는 것은 어떨까
그리움 하나 통째로 넣고 끓이는 것은 어떨까
  • 승인 2019.01.0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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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시인)

씨앗이 휴면기를 갖는 것은 다음 세대로 건너가기 위한 준비 단계라 한다.

휴면기에 들어간 씨앗들은 온도나 빛, 수분 등 외부의 환경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아라홍련’처럼 수백 년의 세월도 너끈히 참아내며 부활의 꿈을 키운다.

얼마 전, 실제로 함안성산산성(사적 제67호) 연못터 발굴 현장에서 수습된, 760여년 만에 깨어난 고려시대 연꽃 ‘아라홍련’의 종자가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종자영구 저장시설인 ‘씨앗’(Seed)과 ‘금고’(Vault)를 합친 ‘시드 볼트’에 저장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씨앗은 싹을 틔울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해, 지난 공책들을 꺼내 써 놓은 글들을 읽으며 고여 있는 줄로만 알았던 내 삶이 다행스럽게도 조금씩 흘러왔음을 깨닫는다. 나만의 속도로, 억지스럽지 않게 걸어왔다는 생각에 이른다.

씨앗 하나, 쉰이 악수를 청한다.

원하지 않아도, 굳이 청하지 않아도 오고가는 계절처럼 내 앞에 쉰이 찾아 와 ‘갱년기’라는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사람들의 눈빛이 두려웠고 세상 모든 것들이 새삼 낯설어졌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불안했다. 나조차도.

씨앗 둘, 사랑에 빠지다.

글을 쓰기로 했다.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잠시 비켜서서 나를 지켜보기로 했다. 독방에 가두어 두고 처절하게 외롭도록 나를 방치했다. 외로움조차도 실컷 신물 나도록 즐겨보라고. 그러다 도저히 견디다 못해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올 수 있기를 기원했다.

그 때 그를 만났다. 시라는 놈. 시를 쓴다는 일이 지독한 사랑에 빠지는 일이란 걸 그 때는 차마 짐작조차 못했다. 다만 제대로 된 놈을 만났다고만. 그리고 가물어 물 마른 빈들의 마른풀 같은 나는 시라는 빗줄기를 맞으며 말할 수 없이 설레고 기뻤다.

씨앗 셋, 늦깎이면 어때.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간절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로 하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문학소녀였던 여고시절, 가정형편으로 인해 꿈을 접어야 했던 그 때를 떠올리며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다신 꿈조차 꿀 수 없을 것만 같은 조바심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간절한 내 마음이 통했는지 흔쾌히 가족들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씨앗 넷, 기적이 내게로 왔다.

제39회 ‘방송대문학상’ 시 부분 대상을 받았다. 그것도 1학년 때였으니 기적이었다.

아버지와 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대신한 ‘그리움이 끓어오른다’란 제목으로 쓴 시였다. 내가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아버지의 이루지 못한 꿈이었고 마지막 유언 때문이었다.

씨앗 다섯, ‘행복과 불행’사이 ‘다행’이 있었다.

결혼 후, 서른 해의 반 이상을 자리보존하고 누워 계시던 시어머님이 영면하시던 날, 가족들 그 누구 한 사람 알아보시지 못한 채 요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하셨다. 친정아버지를 보낸 후 얼마 되지 않은 뒤였다.

살아, 숨 쉰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 가장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우린 또 그렇게 일상처럼, 살기 위해 뜨거운 국에 밥을 말아먹어야했다.

살아서 그 큰 고뇌를 가지고 살았던 아버지와 시어머니, 흙 속에 묻고 나면 다시 사자의 입처럼 무서운 일상이 기다리는 세상이 헛되고 헛되었다.

그 순간, 떠오른 리차즈의 말이 내 맘에 들어와 기어코 싹을 틔웠다. “앞으로 시가 인간에게 종교를 대신할 뭔가가 될 것이다.”

배고픔도 외로움도 참을 수 있는데 그리움만은 참을 수 없이 끓어오른다.

글 속에서는 누워계신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남편의 그리움도 위로해 줄 수가 있다. 가끔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깨워 파전에 동동주 한 잔 거하게 마실 수도 있다.

이렇듯 내게 글을 쓰는 일이란 ‘아라 홍련의 계절’,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그리움을 잠재우는 처방전이며 내 상처의 주치의다.

설혹, 누군가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힘들고 외롭고 지쳤다면 참을 수 없는 그리움 하나 통째로 넣고 끓이는 것은 어떨까. 오직 나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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